〈시간의 파수꾼〉 제9부 – 미래의 눈
기억의 반역자가 사라진 뒤, 잊힌 도시는 한순간 조용해졌다.
광장을 뒤덮던 붉은 안개도 걷혔고, 바닥을 덮고 있던 망각의 그림자들도 흩어졌다.
그들이 싸워 지켜낸 ‘시간의 심장’은 지금 아린의 손 위에서 조용히 박동하고 있었다.
“이제 봉인할 수 있겠지...”
윤시현은 힘겹게 일어섰다.
도시 중심의 ‘기억의 문’은 붕괴 직전이었다.
이 문을 닫지 않으면, 감염된 기억과 시간의 전염은 점점 더 확산될 것이었다.
“심장을 원래 자리로 돌리고, 문을 닫아야 해.”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순간.
하늘에서, 빛이 갈라졌다.
잔잔한 기억의 틈 위로 새로운 균열이 생겨났고, 거기서 전혀 예상치 못한 ‘그것’이 떨어졌다.
빛나는 입자들, 규칙적인 파장, 그리고...
미래의 메시지.
—
윤시현은 급히 장비를 꺼내 데이터를 정리했다.
이건 단순한 시공간 노이즈가 아니었다.
완벽한 패턴을 지닌 의도된 통신이었다.
그 메시지는 14초 분량의 짧은 영상 형태로 변환되었다.
하지만 화면이 켜지자, 그녀와 아린은 말을 잇지 못했다.
“...나야.”
영상 속 인물은, 늙은 윤시현이었다.
백발이 성성하고, 눈에는 피로와 절망이 가득했다.
“이걸 보고 있다면, 우리 시간은 곧 끝나.
기억의 반역자는... 살아남았고, 균열은 되돌릴 수 없는 단계로 퍼졌어.”
“우리는 심장을 봉인했지만, 늦었어.
시간 그 자체가 ‘자각’을 하기 시작했거든.”
“더 이상 기억은 기록이 아니야.
기억은 ‘행동’하고, 선택하고, 복수해.
시간은 이제 인격을 가졌고... 우리에게 화를 내고 있어.”
그녀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심장을 파괴해.
그게 유일한 길이야.”
영상은 거기서 끊겼다.
통신이 끝난 뒤, 하늘 위로 균열이 조용히 닫혔다.
도시는 다시 침묵에 빠졌다.
—
“이건...”
윤시현은 망연하게 심장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잘못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요.”
아린이 조용히 말했다.
“우린 기억을 지키고, 시간의 흐름을 복원하려고 했지만...
그게 더 깊은 의지를 깨운 건지도 몰라요.
시간은 더 이상 수동적인 흐름이 아니에요.”
윤시현은 차분히 생각했다.
“그래.
우리가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는지도 몰라.
기억이 많아지면 시간은 무거워지고,
그걸 버리면 균열이 생긴다.
우린 이제... 세 번째 선택을 해야 해.”
“기억을 지키는 것도, 지우는 것도 아닌...
시간 자체와 대화하는 것.”
—
그날 밤, 잊힌 도시의 마지막 지하 회랑에서
그들은 오래된 금속문 하나를 발견했다.
문 위에는 고대의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시간을 본 자는, 시간을 바꿀 수 없다.
하지만 시간을 들은 자는, 시간을 설득할 수 있다.
윤시현은 말했다.
“이 문은 ‘미래의 대화’를 여는 장치야.
우리가 시간의 흐름과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심장을 이 문으로 가져가야 해요.”
—
회랑 깊숙한 곳에서,
윤시현은 심장을 손에 들고 그 앞에 섰다.
그리고 물었다.
“당신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면,
우리가 당신의 흐름을 깨뜨렸다면—
지금부터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줘.”
순간, 금속문 전체에 푸른빛이 퍼지며 열리기 시작했다.
그 문 안쪽엔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고요한 ‘청색 공간’.
거긴 과거도 미래도 없는 무(無)의 영역이었고,
그곳에서,
그들은 마침내 시간과 직접 마주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