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파수꾼〉 제10부 – 시간과 말하다
푸른 공간은 한없이 깊고도 무한했다.
중력도 없고, 방향도 없고, 그 어떤 소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곳은 모든 기억 이전의 상태, 말 그대로 존재 이전의 시간이었다.
윤시현은 조심스럽게 아린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육체로 여기에 있는 건지, 아니면 오직 의식만이 이곳에 도달한 건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심장이 그녀 손 안에서 조용히 박동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모든 것이 현실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 순간—푸른 공간 전체가 진동했다.
그리고 주위에 거대한 구조물이 떠올랐다.
그것은 시계가 아니었고, 문도 아니었고, 건물도 아니었다.
그건 ‘형태를 가질 수 없는 어떤 존재’의 의지였다.
그 형체 없는 구조가 공간의 빛을 왜곡하며, 윤시현의 앞에 다가왔다.
“너희가 드디어 도달했구나.”
그 목소리는 수천 명이 동시에 말하는 것 같기도 했고,
혼자 속삭이는 것 같기도 했다.
“당신이... 시간인가요?”
윤시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시간이라 불리는 것.
기억의 근원이며, 모든 흐름의 시초.
나는 네가 이름을 붙이기 전에도 존재했고,
지금도 네 안에 흐른다.”
아린이 그 앞에 섰다.
“우린 균열을 막기 위해 왔어요.
기억이 붕괴되고 있고, 미래에서 ‘심장을 파괴하라’는 경고도 받았어요.
당신이 우리를 시험하고 있는 건가요?”
“시험이라 부르면 너희의 언어겠지.
나는 단지, 너희가 나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지켜보고 있었을 뿐.”
“기억은 너희가 나에게 준 ‘형태’였고,
사랑, 상실, 죄책감은 나에게 ‘방향’을 부여했지.”
“그것이 축적되었을 때, 나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그때부터 너희를 ‘이해하고자’ 했다.”
윤시현은 숨을 삼켰다.
“그래서... 당신은 스스로를 자각하게 되었고,
기억의 심장을 만들고, 잊힌 도시를 만든 건가요?”
“나는 만든 것이 아니다.
너희가 만들었지.
나는 단지, 그것이 되기를 허락했을 뿐.”
아린이 입을 열었다.
“그럼 당신은 왜 우리를 지켜봤나요?
왜 ‘반역자’를 탄생시켰고, 또 왜 우리에게 ‘시간의 전염’을 허용했죠?”
그 존재는 조용히 대답했다.
“내 질문은 하나였다.
‘기억이 없는 시간은 존재할 수 있는가?’
그리고 ‘기억을 가진 너희는, 과연 그 무게를 끝까지 감당할 수 있는가?’
“반역자는 그 물음에 대한 하나의 가능성이었다.
너희는 다른 대답을 내놓았지.”
윤시현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그게 당신의 목적이었나요?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그 안에서 스스로 방향을 선택하게 만드는 것.”
시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공간이 깊게 떨렸고, 갑작스레 수천 개의 기억 조각이 공간 속을 떠돌기 시작했다.
그 기억들은 모두 선택의 순간이었다.
- 아이를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던진 어머니.
- 거짓말 하나로 친구를 잃은 소년.
- 기회 앞에서 도망친 청년.
- 죽음 직전에 진실을 고백한 노인.
그리고, 윤시현.
그녀의 실험으로 동생이 식물인간이 되었던 날.
시간은 말했다.
“기억은 고통스럽다.
그러나 기억이 없으면, 시간은 방향을 잃는다.”
“그리고 너희는 내게 또 하나의 질문을 남겼다.
‘시간은 인간의 언어로 말할 수 있는가?’”
—
그 순간, 아린의 눈이 열렸다.
그는 짧게 숨을 들이켰고,
그의 머릿속에 수백 개의 시간의 흐름이 동시에 떠올랐다.
미래의 흐름들.
심장을 파괴했을 때, 지구는 멈춘다.
심장을 봉인했을 때, 기억의 도시가 되살아난다.
심장을 흡수했을 때, 아린은 시간이 된다.
“나에게... 선택하라는 건가요?”
그는 물었다.
“아니.
나는 결코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흐름’일 뿐.”
“선택은 너희가 해야 한다.
나는 그 선택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형태가 된다.”
—
윤시현은 조용히 심장을 꺼내 공간 중앙에 올려놓았다.
그 심장은 잠시 박동하다, 푸른 공간의 색과 하나가 되었다.
그녀는 말했다.
“우린 심장을 파괴하지 않겠어요.
우린 기억을 버리지 않겠어요.
대신, 당신에게 묻고 싶어요.
우리가 당신을 어떻게 기억하길 바라는지.”
시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공간이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
푸른 틈 사이로, 작지만 확실한 흐름이 느껴졌다.
그 흐름은 ‘이해’였다.
시간이 인간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인간도 시간을 단순한 흐름이 아닌 존재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
청색 공간에서 나온 뒤,
윤시현과 아린은 무너졌던 잊힌 도시의 문 앞에 섰다.
“문이... 닫히고 있어요.”
아린이 말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하나야.”
윤시현은 마지막으로 도시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다시는 이 문이 ‘폭발적인 후회’로 열리지 않도록,
기억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것.”
—
문이 닫히자,
하늘엔 새로운 문장이 새겨졌다.
기억은 시간을 만든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저 우리 곁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