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시간의 파수꾼〉 제11부 – 침묵하는 과거

반응형

〈시간의 파수꾼〉 제11부 – 침묵하는 과거

문이 닫히고, 그들이 다시 깨어난 곳은 서울의 크로노 연구소였다.
장비는 고요했고, 외부 시간은 17분밖에 흐르지 않았지만, 윤시현과 아린은 며칠을 보낸 것 같은 피로감에 젖어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확인했다.
“돌아온 게 맞아.”
“...응, 돌아왔어.”

하지만 곧 이상한 점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처음엔 아주 작은 것이었다.
윤시현의 책상 위에 놓인 사진.
원래 그 사진에는 윤시현, 그녀의 동생, 그리고 부모님의 모습이 담겨 있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사진 속에 자신만 서 있었다.

그녀는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분명 동생이 있었다.
분명 자신은 실험 실패로 동생을 의식불명 상태로 만들었고, 그 죄책감으로 크로노 연구에 뛰어든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의료기록에도, 가족관계 증명서에도 ‘동생’이라는 항목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게 뭐지...?”
그녀는 혼잣말을 했다.

아린도 마찬가지였다.
연구소에 복귀한 그는 감지 센서를 통해 자신에게서 방출되는 ‘시간 동조파’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상해요.
저는 여전히 심장을 만졌고, 시간과 접촉했는데...
지금은 마치... 그 모든 게 없었던 것처럼 제 파동이 초기화됐어요.”

그는 윤시현과 함께 데이터베이스를 살펴보았고,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잊힌 도시’에 대한 모든 기록이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연구소 내부 보안 서버에도, 크로노넷에도, 베를린 지부에도.
모든 경로에서 ‘잊힌 도시’는 지워진 듯 존재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이전보다 더 단순한 기억들이었다.

시간의 균열도, 기억의 반역자도,
심장의 박동도 존재하지 않았다.

윤시현은 갑작스럽게 가슴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녀가 체험했던 모든 감정, 선택, 고통, 전투, 그리고 시간과의 대화조차도…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 세상은 조용했다.

“우리가... 시간의 흐름을 되돌린 건 아닐까?”
아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시간이 우릴 받아들인 대신,
우리가 가졌던 기억을 ‘침묵’시킨 건지도 몰라요.”

윤시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어.
그저... 기록되지 않은 거야.

며칠 후.
그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변화한 과거의 흔적들을 마주했다.

카리나 박사는 더 이상 크로노넷에 존재하지 않았고,
리처드는 시계탑이 아닌 ‘소립자 에너지 진동장’ 이론을 연구하고 있었다.
이전과 비슷하지만, 미묘하게 어긋난 시간선.

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 세계는 그 자체로 ‘온전한 과거’를 주장하고 있었다.

윤시현과 아린만이
지금 이 과거가 ‘침묵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밤, 연구소 옥상.
두 사람은 조용히 커피를 나누며 말을 아꼈다.

“이런 느낌, 이상하죠?”
아린이 물었다.

“응.
모든 게 그대로인 것 같은데,
그 어디에도 우리가 있던 기억은 없으니까.”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죠?”

윤시현은 고개를 들었다.
하늘엔 별이 떠 있었고, 달빛은 아주 옅었다.

“기억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우린 ‘기억하고 있어.’
그게 중요해.
우리가 겪은 걸 누군가는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해.”

“시간이 다시 말 걸어오더라도,
이번엔 우리가 먼저 말할 수 있게.”

그날 밤, 윤시현은 연구소 기록 장부의 맨 마지막 페이지에 조용히 손으로 한 문장을 써내려갔다.

“2025년, 우리는 시간과 대화했다.
그 기억은 존재하지 않지만,
나는 결코 잊지 않는다.”

그녀는 펜을 내려놓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침묵하는 과거여,
나는 너를 지켜보고 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