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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파수꾼〉 제12부 – 모래시계의 설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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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파수꾼〉 제12부 – 모래시계의 설계자

윤시현이 연구소 기록지에 손으로 쓴 마지막 문장은
그 어떤 전자 기록보다 강한 무게로 남아 있었다.
단 한 줄.
하지만 그것은 그녀가 ‘존재했던 시간’을 증명하는 유일한 기록이었다.

그날 이후, 윤시현은 세계 곳곳에서 보고되는 작은 시간 오류 현상들을 조용히 수집했다.
교통사고 직전 멈춘 GPS,
라디오에서 한 번도 녹음된 적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온 사건,
그리고 가장 충격적인 사건—

서사라 사막의 지하에서 발견된, 시계탑 조각

현장에 투입된 인류학자들은 조각에 새겨진 문양을 풀지 못했지만,
윤시현은 한눈에 알아봤다.
거꾸로 흐르는 모래시계.
그리고 그 밑에 새겨진 고대문자 세 글자.

DEVAR

“드바르...”
그녀는 곧바로 자료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터넷, 정부 기록, 심지어 고고학 연합 데이터베이스 어디에도 ‘드바르’라는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오래된 아카이브에서 한 문장을 발견하게 된다.
그 문장은 중세 베네치아 시대 사본에 손글씨로 삽입되어 있었고, 문장 하나로 구성되어 있었다.

“모래시계의 설계자 드바르는 시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흐름을 가로지르는 문을 설계했다.”

아린은 윤시현에게 그 이야기를 들은 뒤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럼... 지금까지 우리가 겪어온 모든 균열과 기억의 파동이,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누군가의 ‘설계’였단 거예요?”

윤시현은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시간은 감정으로 방향을 갖고, 기억으로 무게를 가지지만...
‘구조’는 설계가 필요해.
그리고 그 구조를 설계한 자가 있다면,
우린 그 존재의 실험 속에 있었던 걸지도 몰라.”

며칠 뒤, 아린은 자신이 오랫동안 보지 않던 꿈을 꿨다.

그 꿈은 이상하게도 ‘기억의 반역자’와 마주했던 잊힌 도시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오래된 감각,
낯선 하늘, 거꾸로 자라는 나무,
그리고 중앙에 놓인 거대한 모래시계.

하지만 그 모래시계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 안의 모래는 고요했고, 바늘도 없었으며,
대신 그 앞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의 얼굴은 모호했다.
빛에 가려져 형태를 볼 수 없었지만,
목소리만은 분명하게 들렸다.

“넌 흐름 속에서 움직이지만, 나는 흐름을 관찰한다.”

“넌 방향을 찾고, 나는 문을 만든다.”

“우린 같은 구조 속에 있으나, 다른 층에 존재한다.”

“당신이 드바르인가요?”
아린이 물었다.

“나는 질문이었고, 너는 해답이다.”

깨어난 뒤, 아린은 곧바로 윤시현에게 이 꿈을 전했다.
윤시현은 책장을 넘기다 멈췄다.
“이건... 시간의 성질이 바뀌고 있다는 신호야.
우린 이제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시간 구조의 ‘설계’를 이해해야 해.”

그녀는 화이트보드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1. 시간 = 흐름 + 기억
  2. 균열 = 구조 오류
  3. 기억의 반역자 = 구조의 파괴자
  4. 드바르 = 구조의 설계자

그녀는 곧바로 ‘크로노스 대대’로 연락을 시도했다.
한때는 정보와 감시를 넘나드는 비밀 조직이었지만, 지금은 모든 공식 기록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날 밤, 한 통의 암호화 메시지가 도착했다.

[보낸 이: NULL]
“드바르는 실존했다.
그는 잊힌 도시의 창조자이자, 최초의 균열을 허용한 자다.
그는 지금도 살아 있으며, 흐름 너머에서 다음 문을 열고 있다.

윤시현은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다음 문...”

그리고 그날 자정, 연구소 중앙 서버에 새로운 경보가 떴다.
[코드 명: ∆VER-TG013]
좌표: 알래스카 남부 빙하층 심부 – 균열 발생 감지
이동 속도: 비선형 / 구조적 / 설계 기반

그녀는 숨을 삼켰다.
“이건... 자연발생이 아니야.
설계된 균열이야.
다음 문이 열리기 시작했어.”

아린은 조용히 짐을 챙기며 말했다.
“우린 이제 기억을 지키는 걸 넘어서,
‘시간의 건축’을 막아야 해요.”

윤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드바르.
당신은 우리에게 흐름을 보여줬지만,
이제 우린 그 흐름을 바꿔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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