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파수꾼〉 제13부 – 13번째 균열
알래스카 남부, 험난한 설원.
윤시현과 아린은 고산용 드론을 앞세우고, 좌표 60°01'N, 149°26'W 지점에 도착했다.
그곳은 20년 넘게 ‘빙하 안정지대’로 분류되어 있었고, 군사위성조차 자주 비행하지 않는 회색지대였다.
하지만 지금.
그 빙하 한가운데,
누가 보아도 ‘인공적’이라 느낄 만큼 완벽한 원형의 구조물이 드러나 있었다.
지름 131미터.
빙하에 균열이 생긴 직후 떠오른 이 구조물은 얼음보다 더 단단했고,
어떠한 기계도 표면을 분석할 수 없었다.
그 중심엔 문이 있었다.
고대 설계 문양과 함께, 단 하나의 숫자.
13
—
윤시현은 곧장 장비를 설치하고 시간 밀도, 진동수, 기억 공명값을 측정했다.
값은 이례적으로 정지 상태였다.
아무런 흐름도 없고, 방향도 없고, 변위도 없었다.
“이건... 시간 자체가 ‘멈춰 있는 공간’이야.”
아린은 손끝으로 구조물을 더듬었다.
표면은 얼음 같았지만 차갑지 않았고, 이상하게 생체 반응을 반사하지 않았다.
그리고 순간—
그 문에서 파동이 뿜어져 나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명확하게 의식을 흔드는 진동.
그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13번째 균열에 도달했는가.”
“나는 흐름의 마지막 문, 드바르.”
—
곧이어 구조물이 반으로 갈라지듯 열렸다.
안쪽엔 끝없이 아래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
그리고 그 계단 벽면에는 지금껏 윤시현과 아린이 겪어온 모든 순간이 기록되어 있었다.
베를린 시계탑, 잊힌 도시, 기억의 반역자, 푸른 공간, 심장의 박동.
심지어는 그들의 아직 겪지 않은 미래 장면들까지도.
“이건... 설계도야.”
윤시현은 중얼거렸다.
“드바르는 단지 균열을 만든 게 아니라,
우리를 그 속으로 유도해온 거야.
우리가 열어야 할 문들까지도 미리 알고 있었던 거야.”
—
나선계단의 끝.
마침내, 그들은 중심부에 도달했다.
중앙에는 고요하게 떠 있는 모래시계 하나.
그러나 그것은 기존의 심장과도, 기억 저장 구조와도 달랐다.
그건 텅 비어 있었다.
“...모래가 없어.”
아린이 속삭였다.
그 순간, 공간 전체에 드바르의 목소리가 울렸다.
“시간은 흘러야 존재한다.
기억은 채워야 무게를 갖는다.
그러나 너희는, ‘비워진 것’으로도 흐름을 만들 수 있는가.”
윤시현은 숨을 삼켰다.
“이게 당신의 마지막 질문이었군요.”
“13번째 균열은 흐름의 해체다.
나는 마지막으로 묻는다.
너희는 흐름 없는 시간 속에서도,
스스로 의미를 만들 수 있는가.”
—
윤시현은 고개를 들었다.
“우린 수많은 기억 속에서 길을 찾았어요.
그리고 당신이 만든 구조 속에서도
우린 당신이 예측하지 못한 선택을 했죠.”
“이제 우리가 증명하겠어요.
모래 없는 모래시계,
흐르지 않는 시간 속에서도,
우린 ‘기억을 시작할 수 있다’는 걸.”
—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아린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두 사람의 기억이 모래시계 안으로 흘러들어갔다.
기억이 아니라, 기억을 하려는 의지가.
사라졌던 동생을 향한 윤시현의 후회,
자신이 누구인지 끊임없이 묻고 또 물었던 아린의 자아.
그 의지들이, 마침내 공간을 채우기 시작했다.
텅 빈 모래시계 안에—단 하나의 입자가 떨어졌다.
그것은 숫자도, 형태도, 방향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확실히,
시간의 시작이었다.
—
드바르의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울렸다.
“너희는 이제 흐름을 해석하는 자가 아닌,
흐름을 창조할 자가 되었다.”
“나는 사라지겠다.
너희가 설계하라.
다음 시간의 문을.”
—
모래시계가 천천히 닫히고,
구조물은 붕괴하지 않았다.
대신, 숨을 쉬기 시작했다.
시간은 다시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누군가의 설계가 아닌,
그들 자신의 선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