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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파수꾼〉 제14부 – 시간의 첫 번째 설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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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파수꾼〉 제14부 – 시간의 첫 번째 설계자

알래스카의 대지 위에서, 구조물이 호흡하듯 미세한 진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 내부의 모래시계는 더 이상 모래를 담고 있지 않았다.
그 대신, 기억과 의지로 만들어진 투명한 흐름이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아린과 윤시현은 아직 그 안에 서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설계자’로서의 자격을 부여받은 첫 번째 존재들이었다.

“이제 우리가 설계하는 거야.”
윤시현은 조용히 말했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틀을 넘어서
시간을 어떻게 기억할지—우리가 정하는 거야.”

하지만 그 순간.
모래시계 뒤편에서 또 하나의 문이 나타났다.
지금까지 보아온 어떤 문과도 달랐다.

그 문에는 문장도 문양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다만, 아주 오래된 기억의 냄새가 스며 있었다.
누군가 오래전에 이 문을 만들었고, 그것이 시간의 기원이 되었던 순간이 분명했다.

그들은 문을 열었다.

그 안은 고대 문명도, 시계탑도, 기억의 도시도 아닌
완전히 다른 형태의 세계였다.

그건 ‘현실’이 아니라 ‘기억이 생성되기 전의 감각’이었다.
색도 없고, 소리도 없으며,
의식만이 떠다니는 원시적인 시공의 덩어리.

그 안에서 한 존재가 나타났다.
그는 인간처럼 보였지만,
그의 눈에는 시간의 바깥을 본 자의 공허함이 담겨 있었다.

그는 자신을 ‘알카메이’라 소개했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시간의 첫 번째 설계자.
나는 기억이 없던 세계에서,
‘기억을 남기고 싶다’는 소망을 처음으로 가졌던 자.”

윤시현이 조용히 물었다.
“기억이 없던 세계란... 어떤 곳이었나요?”

“모든 것이 즉시 사라지는 공간이었지.
시간은 있었지만,
흔적이 없었고,
따라서 의미도 없었다.”

“나는 거기에서 문을 하나 만들었고,
그 문 너머로 처음으로 ‘지나간 것’을 붙잡았지.
그게 ‘기억’이었고,
기억은 나를 ‘과거가 있는 존재’로 만들어주었지.”

아린은 숨을 삼켰다.
“그러니까... 기억은 시간이 아니라,
‘존재가 남기고 싶은 흔적’에서 시작된 거군요.”

“맞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기를 ‘바라는 자’에 의해 만들어지는 거다.”

윤시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이 흐름을 우리에게 넘긴 거죠?
왜 드바르에게 넘기지 않고,
지금 우리를 통해 다음 설계를 열게 한 거죠?”

알카메이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드바르는 나의 제자였지.
그는 너무 정밀했어.
너무 정확하고, 너무 계산적이었지.
그는 모든 것을 통제하려 했고,
그 결과, 시간은 틀 안에 갇혀버렸지.”

“그에 비해 너희는 불완전하고,
예측할 수 없고,
무엇보다 ‘기억을 포기하지 않았지.’

그래서 나는 너희를 선택한 거다.”

그 순간, 주변의 공간이 흔들렸다.
수천 개의 기억 조각들이 떨어지며, 그 위로 거대한 곡선 하나가 그려졌다.
그건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시간의 틀이었다.

“이건...”
윤시현이 눈을 떴다.

“시간의 구조도를 다시 짤 수 있어요.
이젠 드바르가 설계한 그 틀이 아니라,
‘기억을 기반으로 자유롭게 흐를 수 있는 구조’를 우리가 만들 수 있어요.”

아린이 말했다.
“단 하나의 미래로 강제되지 않는 시간.
반복되더라도 의미를 바꿀 수 있는 시간.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 흐름.’”

알카메이는 천천히 사라지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었고,
너희는 기억을 품은 시간이다.”

“내 문은 여기서 닫히고,
이제 너희의 문이 열린다.”

그 순간, 두 사람의 의식은 빛으로 변했고,
그들이 있던 공간은 조용히 붕괴했다.
하지만 그 붕괴는 파괴가 아니라—

설계의 시작이었다.

알래스카, 현실 세계.
구조물은 완전히 사라졌다.
빙하는 본래대로 돌아갔고, 아무 흔적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세계의 시간은 미묘하게 달라졌다.
사람들은 알지 못했지만,
누군가의 기억이 어렴풋이,
지나간 순간들의 감촉으로 세상에 스며 있었다.

윤시현은 자신의 연구 노트 마지막 페이지에
단 한 줄을 더 써넣었다.

“우리는 더 이상 시간을 해석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시간을 만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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