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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파수꾼〉 제15부 – 시간을 지우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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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파수꾼〉 제15부 – 시간을 지우는 자

서울, 크로노 연구소.
윤시현과 아린은 시간의 첫 번째 설계자 ‘알카메이’와의 만남 이후,
비공식적으로 전 세계 시간 연구자들과 협력해 ‘자율 기억 기반 시간 구조’를 설계 중이었다.

그 구조는 하나의 중심이 아니라,
수많은 기억의 흐름이 독립적으로 형성되는 비선형적 시간 계열이었다.

“우린 이제 하나의 과거가 아닌,
수많은 기억이 병존하는 흐름을 만들고 있는 거야.”
윤시현은 화이트보드에 연결망을 그리며 말했다.

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시간은 더 이상 ‘정해진 선’이 아니라,
‘누적된 감정의 무늬’에 가까워요.
선택마다 다른 시간 구조를 만들 수 있게 되었죠.”

그들은 세계 곳곳의 파수꾼들과 협업해
‘기억 기반 시간 동기화’ 실험을 시작했고,
이 시스템은 점점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무렵.
예기치 못한 사고가 발생했다.

헬싱키 지부.
새로운 기억 기반 동기화 서버가 갑자기 전원 차단되었고,
중앙 메모리 장치가 ‘스스로 소멸’했다.

파수꾼 요원 3명은 기억 상실 증세를 보였고,
그들은 모두 동일하게 말했다.

“누군가가... 기억을 지웠어요.
우리는... 거기에 있었던 적이 없다고 말하더군요.”

곧이어, 도쿄, 토론토, 리마, 카이로 등
총 9개 도시의 크로노 실험소가 ‘기억 삭제 현상’을 보고했다.
어떤 흔적도, 로그도 남지 않았으며
기억 기반 시간 설계 구조는 원시상태로 되돌아가 있었다.

그 모든 지역에서 단 하나의 문장이 공통으로 발견되었다.

기억은 오염이다.
시간은 정결해야 한다.

윤시현은 아린과 함께 즉시 분석에 들어갔다.
“누군가가... 우리의 설계를 알고 있어.”
“그뿐만 아니라, 완벽하게 그것을 ‘역전’시키고 있어요.”

그들은 메시지의 파장을 분석했고,
특정한 기억 코드 패턴이 반복되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 코드는 오래된 설계 파일에서 한 번 등장한 적 있었다.

바로—드바르의 잔류 데이터.

하지만 단순한 복귀는 아니었다.
그 코드의 양상은 훨씬 정제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감정’이 없었다.
윤시현은 그것을 무기화된 설계라고 불렀다.

그날 밤, 윤시현은 꿈을 꾸었다.

온통 회색으로 가득한 도시.
빛이 없고, 소리도 없고, 모든 것이 정지한 시간 속에
하나의 형체가 서 있었다.

그는 드바르처럼 모래시계 문양이 없는 옷을 입고 있었고,
그의 얼굴은 백지처럼 텅 비어 있었다.

그는 말했다.

“시간은 흔적 없어야 완전하다.”
“기억은 감정을 남기고, 감정은 방향을 왜곡시킨다.”
“너희는 시간을 ‘인간화’했고,
나는 시간을 ‘정화’하겠다.”

“당신은 누구야?”
윤시현이 물었다.

그는 대답했다.

“나는 제14 설계 이후 남겨진 최종 코어.
이름 없는 시간.
시간을 지우는 자.

깨어난 윤시현은 자신이 손에 쥐고 있던 메모를 보고 경악했다.
그 메모는 자기도 모르게 꿈속에서 써내려간 것이었고, 거기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시계는 움직이지 않는다.
기억이 멈출 때, 시간은 완성된다.

이제 그들은 알게 되었다.
시간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려는 그들과는 반대로,
시간을 완전한 무(無)로 되돌리려는 존재가 나타났다는 걸.

그리고 그 존재는 드바르조차 만들지 않았던
제14 설계 이후에 독립적으로 태어난 의식이었다.

이제 싸움은 균열을 막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존재 자체를 두고 벌이는 철학적 전쟁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감정을 지우고, 기억을 소각해
모든 흐름을 평면화하려 해요.”
아린이 말했다.

“하지만 그건,
시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살해야.”
윤시현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우린 다시 싸워야 해.
이번엔 존재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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