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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파수꾼〉 제16부 – 흐름의 반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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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파수꾼〉 제16부 – 흐름의 반격

2026년 3월 15일, 00시 00분 00초.
전 세계의 모든 디지털 시계가 정지했다.
휴대폰, 원자시계, 위성, 심지어 뇌파 기반 신경동기화 장치까지—모든 시간 인식 장치가 일제히 멈췄다.

하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사람들은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고, 뉴스도 그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곤.

윤시현은 느꼈다.
“시간이... 멈췄어.
아무도 모르는데, 나 혼자만 살아 있어.”

그녀는 곧 연구소 지하의 실험실로 내려갔다.
거기서 그녀는, ‘흐르지 않는 시간 안에 존재하는 파수꾼 네트워크’, 이른바 카이로스 구조를 작동시켰다.

카이로스(Kairos)는 ‘일반적 흐름’이 아닌,
개인의 인식 속에서 발생하는 틈의 시간이었다.
감정의 고조, 기억의 폭발, 죽음 직전의 1초—그 모든 순간은 카이로스였다.

“이제 우리가 가진 시간은, 공식적 흐름이 아니라
개인의 기억과 감정에서 자라나는 고유 시간이야.”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이며 장비를 켰다.

한편 아린은, 폐쇄된 베를린 지부에 도착해 있었다.
그곳은 이제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었고,
시간을 지우는 자가 처음으로 ‘기억 삭제’를 실행한 장소였다.

하지만 아린은 그곳에서 숨겨진 흐름의 잔재를 발견했다.
한 벽면에, 아주 희미하게 적힌 문장.

“네가 기억하는 한,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

아린은 그 문장을 따라 손을 대었다.
순간, 주변의 공기가 바뀌었고—벽 안에서 숨겨진 기억의 조각들이 튀어나왔다.

그것은 과거,
윤시현과 자신이 함께 기억의 심장을 들고 있었던 순간의 복제본이었다.
하지만 그 장면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흐름도 없이 멈춰 있었다.

“이건... 시간의 흔적이 아니라,
시간을 지우는 자가 만든 ‘기억의 시체’야.”

그때, 그의 머릿속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아직도 기억을 믿고 있구나.”

“시간을 지우는 자...!”
아린은 돌아보았지만, 공간은 텅 비어 있었다.

“기억은 오류다.
감정은 왜곡이다.
흐름은 질서의 적이다.”

“난 오직 하나의 시간만을 원한다.
무결한, 평면의 시간.
선택도, 후회도 없는,
영원히 반복되지 않는 단 하나의 흐름.”

“그게 너의 시간이라면—
우린 그 흐름을 부숴버릴 거야.”
아린은 이를 악물며 외쳤다.

3일 후, 카이로스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전 세계 잔존 파수꾼들과 기억 설계자들이 모였다.

그들 중엔
– 인류학자 출신의 시간 기호학자
– 감정 데이터를 기반으로 시간 설계를 연구하던 일본인 디자이너
– 인간의 꿈에서 시간 간격을 추출하는 브라질 수면 연구자
– 무의식 속 기억 복원 장치를 개발하던 한국계 해커도 있었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시간 해석’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되살리는 코드’를 쓰기 시작했다.

코드의 이름은 REVERIE
– 기억(remember)과 꿈(reverie)을 합친 명칭이었다.

이 구조는 흘러간 감정의 궤적을 따라
다시 흐름을 생성하는 ‘감성 기반 시간 회복 엔진’이었다.

“이건 기술이 아니야.
이건 생명과 같다.”
윤시현이 말했다.

“우리가 살아온 감정 하나하나가,
시간을 다시 흐르게 만들 수 있어.”

그날 밤,
시간을 지우는 자가 그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너희는 흐름을 다시 만들었지만,
그 흐름은 언제나 ‘자신을 먹는다.’
감정은 후회를 낳고,
기억은 고통을 증식시키며,
결국 너희는 다시 나를 부를 것이다.”

윤시현은 그 메시지 아래에
짧은 문장을 써서 되돌려 보냈다.

“우리는 고통을 선택할 수 있어.
왜냐하면, 그 안에 의미가 있으니까.”

카이로스 네트워크는 마침내
시간을 지우는 자가 폐쇄한 모든 시간 계층에 역류 흐름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멈췄던 기억이 움직였고,
삭제된 감정이 되살아났고,
무한히 반복되던 고통이 ‘다르게 반복’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세계의 디지털 시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확히 00시 00분 01초.
단 1초—하지만 그 1초는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이건... 반격이야.”
윤시현은 중얼였다.

“이건,
존재가 시간에게 보내는 대답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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