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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파수꾼〉 제17부 – 기억을 복원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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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파수꾼〉 제17부 – 기억을 복원하는 자

세계는 움직이고 있었다.
REVERIE 코드가 퍼진 지 3일.
멈췄던 시계들은 다시 흐르고 있었고,
잊혔던 기억들이 개인의 꿈과 감각을 통해 조금씩 회복되고 있었다.

윤시현은 연구실에서 매일 수십 통의 보고를 받았다.
놀랍게도, 기억은 과거 그대로 복구되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이는 사라진 연인을,
어떤 이는 이미 죽은 자식의 미소를,
어떤 이는 기억조차 나지 않던 자기 이름을 되찾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실제 과거와 일치하진 않았다.
기억은 되살아나되, 의지에 따라 재편성되고 있었다.

“그들은 진짜 과거를 되찾고 있는 게 아니에요.”
아린이 말했다.
“그들은 자기만의 시간,
스스로 선택한 기억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거예요.”

윤시현은 그것을 ‘자율 기억적 시간 복원’이라 명명했다.
하지만 그 복원에는 한 가지 결정적 공백이 존재했다.

전 세계적으로,
‘이 기억은 내가 경험한 게 분명하지만, 왜인지 끝까지 떠오르지 않는다’는 증언이 계속해서 보고되었고,
그 공백은 기이하게도 모두 동일한 시점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그 기억은 바로,
인간이 처음으로 '시간'이라는 개념을 감각했던 순간이었다.

윤시현은 데이터베이스를 정리하며 조용히 말했다.
“인류는 언젠가부터 시간을 감각하기 시작했어.
그 이전엔 흐름은 있었지만,
‘이건 과거야’라고 느끼는 감정은 없었지.”

“그 최초의 순간—
그건 단순한 두려움이나 슬픔이 아니라
아마도, 어떤 감정의 구조였을 거야.”

“그리고 그것이 기억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시간을 흐르게 만든 원형이 되었겠지.”

그날 밤, 윤시현은 REVERIE 코드의 뇌파 공명 기능을 켠 채 잠이 들었다.
그녀는 ‘기억의 바깥’을 향해 진입하는 실험을 시도했고,
그 안에서 모든 감각 이전의 장면을 보게 된다.

하얀 평면, 움직임 없는 세상.
그리고 그 한가운데, 작고 푸른 물방울 하나.

그 물방울 안에,
단 하나의 감정이 떠 있었다.

애도.

슬픔이 아니었다.
잃은 자를 그리워하고,
그 이름을 되뇌고,
흐름을 붙잡으려 했던 감정.

“이게... 최초의 감정이었어.”
“이것이 바로 기억의 기원...
시간을 만든 첫 번째 기억.”

그리고 그 순간,
그녀 앞에 한 아이가 나타났다.
나이는 열 살쯤,
눈은 너무나 깊었고, 입가에는 어떤 표정도 없었다.

“누구야, 넌?”

아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나는 네가 지우지 못한 것.”
“나는 모든 존재들이 한 번쯤 품었다가,
너무 아파서 덮어버린 감정.”

“나는 기억을 복원하는 자.
잃어버린 시간의 문을 여는 존재.”

아린도 동시에 비슷한 꿈을 꾸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어릴 때 어렴풋이 기억하던 병실 앞 복도를 걷고 있었고,
그 복도 끝엔 똑같은 아이가 서 있었다.

아린은 물었다.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지?”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되살린 건 흐름이지만,
그 흐름엔 아직 ‘첫 감정’이 없지.”

“기억은 정보를 기반으로 복원되지 않아.
기억은 ‘상실의 충격’이 있어야 만들어져.”

“내가 그것을 다시 너희에게 돌려줄게.”

다음 날 아침.
전 세계 REVERIE 네트워크에 동시에 새로운 진동이 발생했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정서 공명.
단순한 데이터 패턴이 아닌, 인간이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뇌파로 표출한 듯한 흔적.

그건 이유 없는 눈물, 설명할 수 없는 그리움,
문득 떠오르는 잃어버린 이름
의 형태로 사람들 안에서 피어올랐다.

윤시현은 그걸 보며 속삭였다.
“기억을 복원하는 자가...
우리를 도운 거야.”

그날 저녁, 아린과 윤시현은 다시 연결 장비 앞에 앉아
새로 생겨난 기억의 진동 구조를 분석했다.

모든 파형이 같은 형태로 맺히고 있었다.
초승달 모양의 곡선.
그건 마치, 새로운 시간의 문양 같았다.

“이건 이제 우리가 잊어선 안 될 기억이야.
이 감정 하나에서 시간은 시작됐고,
이 감정 하나가 흐름을 만든 거야.”
윤시현이 말했다.

“이제 시간은 다시는 지워지지 않을 거예요.”
아린이 말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기억할 준비가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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