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파수꾼〉 제1부 – 눈 없는 시계탑
한밤중, 세계 각지의 전자시계가 멈췄다. 뉴욕의 브로드웨이 대형 전광판도, 도쿄 시부야 교차로의 LED 시계도, 서울 광화문의 보신각 종각 아래 시계도 모두 동일한 시각을 가리켰다. 오전 3시 33분 33초.
하지만 기묘하게도 그 시각에 아무도 잠에서 깨지 않았다. 감지한 건 기계들뿐이었다.
서울대학교 물리학부 연구실.
윤시현 박사는 새벽에 울리는 경보음을 듣고 화들짝 잠에서 깼다. 그녀의 책상 위에 놓인 양자 시계가 붉은빛으로 점멸하며 진동하고 있었다.
“시간 간섭 현상 감지됨. 코드 118. 파동 중심: 북위 52도 12분 24초, 동경 13도 24분 37초.”
“베를린...?”
윤시현은 곧장 데이터 로그를 확인했고, 기이한 그래프에 숨을 멈췄다. 시간의 흐름이 특정 지점에서 파형처럼 일렁이다 끊겨 있었다.
그녀는 곧 국제 비상 과학자 통신망, 일명 ‘크로노넷’에 접속했다. 전 세계 열다섯 명의 시공간 전문가만이 접근할 수 있는 이 폐쇄망에는 이미 수십 개의 메시지가 올라와 있었다.
[루치오 바렌티니 박사]: 3시 33분 33초, 나도 감지했네. 로마의 아스트롤랩이 자정을 다시 가리키고 있어.
[아오이 미즈키]: 도쿄타워 정상에서 시간 왜곡 관측. 파동 세기 코드 9. 그건 거의...
시현은 숨을 삼켰다. 코드 9는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사건’ 수준의 경보였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시공간 이상현상 국제대응기구’, 일명 “파수꾼”의 긴급 호출 버튼을 눌렀다.
—
4시간 후, 독일 베를린.
폐쇄된 유대인 묘지 지하에 위치한 비밀 기지.
‘파수꾼’ 베를린 지부.
윤시현은 익숙한 얼굴들과 마주했다. 은퇴했을 줄 알았던 노교수 다비드, 양자 구조 해석 전문가 카리나, 시간단층복원 엔지니어 리처드, 그리고 ‘시간 유전자’를 타고났다는 미스터리한 청년 아린.
“이번 건 평범한 오류가 아니야.”
리처드가 지도의 특정 지점을 가리켰다.
“이곳. 베를린 동부, 슈프레강 근처 폐쇄된 옛 시계탑. 1945년, 마지막으로 시계를 멈춘 곳이지.”
“그 시계탑... 눈이 없다고 불리지.”
다비드가 중얼였다.
“무슨 말씀이신가요?” 시현이 물었다.
“어느 방향에서도 시간을 보지 못하게 만든 시계탑. 시계는 있지만 숫자도 없고, 바늘도 없지. 그런데도 항상 3시 33분을 가리켜.”
그 순간, 방 안의 조명이 깜빡였다.
“여기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카리나가 놀랐다.
윤시현은 서류를 내밀며 말했다.
“이건 단순한 물리 현상이 아니에요. 시공간에 의지가 개입된 흔적이에요. 인간의 의지가 아닌, 더 고차원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 안의 벽이 ‘삐익’ 하고 갈라지더니, 내부에서 차가운 기운과 함께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섰다.
그들은 검은 제복을 입고 있었고, 왼쪽 가슴엔 모래시계가 거꾸로 뒤집힌 마크가 새겨져 있었다.
“여긴 우리가 접수하지.”
선두에 선 중년 남자가 말했다.
윤시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크로노스 대대...”
‘파수꾼’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 문제를 다루는 세계 비밀 조직. 그들은 시간 질서를 인류를 위해 유지한다기보다는 자신들의 존재를 위해 통제한다.
“그 시계탑 안에 뭔가가 깨어났어.”
중년 남자가 말했다.
“그건 단순한 시계가 아니야. 그건... ‘기억을 저장하는 기계’야.”
—
그날 밤, 시계탑 근처.
윤시현, 아린, 카리나, 리처드는 철조망을 넘고 폐허 속 시계탑 앞에 섰다. 시계탑은 어두운 하늘 아래 거대한 그림자처럼 서 있었고, 숫자 없는 시계판은 마치 눈이 뽑힌 자의 얼굴처럼 서늘했다.
아린이 갑자기 말했다.
“이 시계탑은... 누군가의 기억으로 만들어졌어요.”
“무슨 소리야?” 카리나가 물었다.
“기억에는 ‘시간’이 녹아 있죠. 하지만 그 기억을 왜곡하면... 과거도 미래도 바뀌어요. 이 시계탑은 기억을 기반으로 시간을 조종하는 장치예요.”
그 순간, 시계탑에서 금속성 떨림이 울렸다.
그리고 하늘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사람의 형상을 한 그림자들.
그러나 그 그림자들은 발이 없고, 얼굴이 없고, 시간의 외피를 뒤집어쓴 존재들이었다.
“기억의 감시자들이다...”
다비드 박사의 말이 떠올랐다.
“기억의 감시자들은 인간의 의식 속 시간을 탐식한다. 그리고 기억이 지워진 자는, 결국 ‘과거를 잃은 존재’가 된다.”
윤시현은 숨을 고르며 외쳤다.
“이제부터, 이 시계탑을 ‘봉인’해야 해요.”
아린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 탑은 봉인해서는 안 돼요. 우린... 이 안에 있는 ‘누군가의 기억’을 되살려야만 해요.”
—
그때, 시계탑의 내부에서 거대한 문 하나가 열렸다.
그 문 너머로 아린은 한 걸음 다가가며 속삭였다.
“그 기억 속에서... 나의 과거가 들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