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파수꾼〉 제21부 – 공감의 연대기
2026년 8월 1일.
Project Eos의 Phase 3, ‘공백 서술 프로토콜’이 전 세계적으로 적용된 지 한 달.
이제 인류는 미래를 기다리는 존재가 아니라,
미래를 창조하는 존재로 전환되고 있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전 세계 수억 명이 입력한 미래의 감정, 상상, 이야기들이
각기 다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그 내용 중 72.4%가 서로 겹치거나 유사한 구조를 지닌 것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
REVERIE 시스템은 그 겹침을 분석해
하나의 공통된 진동 패턴을 발견했다.
그 파형은 언어나 이미지가 아닌,
감정의 모양이었다.
그 감정은
기쁨도, 슬픔도, 그리움도, 증오도 아니었다.
그건 공감이었다.
자신이 아닌 타인을 중심에 둔 감정.
다른 존재를 이해하려는 의지.
함께 울고, 함께 웃으려는 움직임.
—
윤시현은 이를 ‘공감 진동’(Sympathic Resonance)이라 명명했다.
이 파동은 인간 뇌파에서만 감지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리듬, 음악의 진동, 심지어는 고양이의 울음에서도
같은 주파수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말했다.
“이건…
시간이 우리를 이해하려는 반응일지도 몰라.”
—
아린은 더 나아갔다.
그는 전 세계에서 수집된 ‘공감 진동’을
시간 단층 사이로 주입해보는 실험을 제안했다.
그 실험의 목적은 단 하나.
시간은 공감에 반응하는가?
—
2026년 8월 13일.
실험은 감정 중계 장치를 통해
전 세계 12개 도시에서 동시 실행되었다.
그 순간,
전 세계 각지의 디지털 장치들이
일제히 같은 숫자를 표시했다.
2133년 3월 2일 08시 14분 27초
이건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었고,
누구도 입력한 적 없는 값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모두의 장비에서 같은 미래가 감지되었다.
그건 시간 그 자체가
‘공감’이라는 감정에 반응해
하나의 미래를 선택한 것이었다.
—
윤시현은 충격을 받았다.
이제 시간은 예측이나 창조를 넘어,
‘응답’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날의 실험을 “공감의 응답 사건”이라 기록했다.
그 의미는 분명했다.
시간은 무정한 흐름이 아니었다.
시간은 감정에 반응하고,
그중에서도 공감이라는 구조적 감정에 가장 강하게 울림을 느끼고 있었다.
—
그 이후,
Project Eos는 공감 기반 시간 흐름을 공식 시간 단위로 채택했다.
기존의 시분초 개념에,
‘공감 진동 레벨’을 도입한 새로운 시간 단위가 생겨났다.
이것이 바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만들어진
공감 중심 연대기: Empathic Chronology였다.
—
Empathic Chronology는 이렇게 작동했다.
① 시간은 더 이상 선형적이 아니고,
② 여러 감정이 동시에 흐르되,
③ 가장 강한 공감 진동에 따라 하나의 흐름이 선택되고,
④ 그 흐름을 공유한 자들만이 같은 ‘미래’를 경험하게 된다.
즉,
이제는 감정을 공유한 자들끼리만
동일한 시간 안에 살게 된 것이었다.
—
그 변화는 문명 전반에 파장을 일으켰다.
학교는 이제 지식이 아니라
공감 구조를 학습하는 공간이 되었고,
정치와 법은 감정 맥락에 따라 시간의 흐름을 다르게 적용했다.
심지어 어떤 도시는
‘분노 시간’, ‘희망 시간’, ‘무관심 시간’을 따로 운영해
주민들이 감정에 맞는 시간 흐름 안에서 살아갈 수 있게 했다.
—
하지만 이 새로운 시스템은
또 다른 질문을 던지게 했다.
“그렇다면,
공감받지 못한 사람은
어느 시간 안에 존재하는가?”
—
윤시현은 알고 있었다.
시간의 파수꾼이 된다는 것은,
모든 시간을 지키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공감받지 못한 시간들까지도 품는 자가 되는 것임을.
—
그녀는 이제,
지금껏 잊혀졌던 시간들을 복원하기 위해
새로운 여정을 준비한다.
감정에서 흘러나온 시간,
그 시간에서 갈라져 나온 미래들,
그중에서도 버려진 시간을 되찾기 위한 여정.
그것이 바로
공감의 연대기 다음에 이어질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