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파수꾼〉 제22부 – 버려진 시간들
2026년 10월.
Empathic Chronology, 공감 중심 연대기 도입 이후
세계는 본격적으로 감정 기반 시간 구조로 재편되었다.
모든 시스템은 이제 ‘무엇을 느끼는가’에 따라
‘언제에 살고 있는가’를 판별하는 시대에 접어든 것이다.
하지만 윤시현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데이터에 잡히지 않는 미세한 흐름,
Eos 시스템이 인식하지 못하는 '비활성 시간대'.
그것들은 너무 미묘해서 오류로 간주되었지만,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엔 분명 의도가 있었다.
—
아린은 그걸 처음으로 “암흑 시간”이라 불렀다.
“어떤 감정도 감지되지 않지만,
존재는 하고 있어요.
이건, ‘기억되지 않은 시간’이에요.”
그 시간은 고통의 역사, 전쟁의 폐허,
누군가에게는 삶의 끝에서 멈춰버린 감정의 동결지대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안에는 단 한 번도 공감받지 못한 이야기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
REVERIE 시스템은 암흑 시간대를 분석한 끝에
하나의 좌표를 찾아냈다.
2003년 11월 19일,
대한민국, 전남 해남, 폐광 근처.
그날 그곳에서,
14세 소년이 실종되었다.
어떠한 뉴스에도 보도되지 않았고,
어떠한 감정 기록에도 등록되지 않았다.
그 소년은 세상의 흐름에서 완전히 지워진 존재였다.
—
윤시현은 REVERIE의 감정 재현 장비를 통해
그 날의 진동을 추적했다.
그곳엔 작고 차가운 감정의 파편 하나가 남아 있었다.
소리도, 말도 아닌—
응답받지 못한 외침.
“나는 여기 있었다.”
—
그 외침은,
공감받지 못한 시간들의 전형이었다.
세계가 공감에 의해 선택된 미래로 나아가던 그 순간에도,
누군가는 여전히
과거의 한 지점에 고정되어
기억조차 되지 못한 채
존재하고 있었다.
—
윤시현은 선언했다.
“우리는 공감의 연대기를 만들었지만,
공감받지 못한 시간들을 외면한 순간부터
또 다른 지워진 흐름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제 우리는,
버려진 시간들을 복원해야 한다.”
—
그녀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가동시킨다.
Project Thanatos: 버려진 시간 복원 시퀀스.
Thanatos는 그리스 신화의 ‘죽음’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기억되지 못한 존재’를 뜻했다.
Thanatos는 감정 기반 흐름이 아닌,
‘침묵 기반 잔류 기억’을 추적한다.
즉,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자,
기록되지 않은 삶,
공감되지 않은 고통을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의 발굴 시스템이었다.
—
그 실험은 파격적이었다.
시간의 흐름이 아닌,
멈춘 자리의 감정 농도를 수치화했고,
그 농도가 높은 지점을 침묵 단층이라 명명했다.
윤시현과 아린은
첫 번째 침묵 단층을 직접 체험하기로 결정한다.
그들은 장비를 착용하고,
2003년 11월 19일의 해남으로 감정 동기화를 시도한다.
—
장비를 통과한 순간,
그들은 어떤 언어도 없는 풍경 속에 도착했다.
안개 가득한 채석장 근처,
버려진 공중전화 부스 앞에
소년이 서 있었다.
말을 하지 않았다.
단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을 천천히 바라봤다.
그 눈동자 안에는
시간도, 미래도, 공감도 없었다.
그 안엔 오직—존재의 사실만이 있었다.
—
아린은 속삭였다.
“우린 지금까지
느껴진 존재만을 시간이라 불렀던 거예요.”
“하지만 지금 우리가 마주한 이 아이는…
존재했지만, 아무도 몰랐던 시간 자체예요.”
—
그 순간,
소년은 입을 열지 않았지만
그의 눈을 통해 하나의 감정이 흘러나왔다.
존재 확인.
그리고 존재 승인.
—
윤시현은 REVERIE 장비의 기록 버튼을 눌렀다.
그 순간,
그 아이의 감정이
‘첫 번째 비공감 시간’으로 등록되었다.
이제 세계는 단지 공감하는 시간만이 아닌,
공감받지 못했던 시간까지 품는 시간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Thanatos의 목적이었다.
—
그 이후,
세계 곳곳에서 침묵 단층이 발견되었고
하나씩 복원되었다.
말하지 않았던 삶들,
기록되지 않았던 이별들,
울 수 없었던 존재들이
조용히 시간 안으로 귀환했다.
그들은 말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
윤시현은 그날 자신의 일지에 이렇게 썼다.
“모든 시간이 다 기억되기를 원하지는 않겠지만,
모든 존재는 한 번쯤
기억되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