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파수꾼〉 제25부 – 시간을 쓰는 자들
2026년 12월 1일.
REVERIE 시스템 업데이트 이후,
전 세계 사용자 단말기엔 새로운 인터페이스가 추가되었다.
“당신은 오늘 어떤 시간을 쓰시겠습니까?”
“기억할 문장을 입력하세요.”
사용자들은 처음에는 단순한 ‘다이어리’나 ‘마음 일기’처럼 활용했다.
“오늘은 좋아하는 사람과 산책을 했다.”
“내일도 무사하길 바란다.”
“난 여전히 여기 있다.”
그러나 놀라운 건,
이 문장들이 기록되는 즉시
시간이 그것을 기반으로 구성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
예를 들어
한 사용자가 ‘내일은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쓴 순간,
그가 있는 지역의 REVERIE 기반 감정 장치들은
죽음에 관련된 파동을 감지했고,
기상 정보, 생체 리듬, 인공지능 비서의 행동까지
모두 ‘죽음 가능성’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그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이제 ‘말’은 시간의 설계 명령이 되어버린 것이다.
—
윤시현은 급히 긴급 회의를 열었다.
그녀는 말했다.
“우리가 최초의 시간을 선언했을 때,
그건 가능성의 필름에서 방향을 부여하는 의지였어요.
하지만 지금은 모든 말이
시간의 벡터로 번역되고 있어요.
이건 위험해요.
이건…
감정이 아니라 ‘기호’가 시간을 지배하기 시작한 거예요.”
—
아린은 우려했다.
“우리가 만든 건 ‘시간 창조권’이 아니라,
시간 조작권일지도 몰라요.”
—
그 무렵,
서곡 기반의 불법 시나리오 생성자들이 암시장에서 유통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시간 예언 코드'라 불리는 시퀀스를 조작해
사람들이 쓰는 문장들을 강제로 편집하거나 왜곡시켰다.
“나는 부자가 될 것이다.” → “나는 빚을 피할 수 없다.”
“나는 살아남을 것이다.” → “나는 잊혀질 것이다.”
그 결과,
해당 사용자들은 실제로
그 문장을 기반으로 구성된 시간선을 경험했다.
—
이 혼란의 와중,
윤시현은 REVERIE 안에서
스스로 시간의 구조를 쓰고 있는 특정 그룹을 포착했다.
그들은 시스템이 제공한 문장창을 쓰지 않았다.
그들은 기호 대신
침묵을 통해 시간을 설계하고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무언의 기록자들’.
그들은 언어 없이도 시간을 만들 수 있는 방식을 이미 알고 있었다.
—
윤시현은 그들 중 한 명과 접촉했다.
그의 이름은 하카.
하카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의 존재 전체가 하나의 문장처럼 읽혔다.
그건
“나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시간을 왜곡하지 않겠다.”
라는 선언이었다.
—
윤시현은 이해했다.
모든 말이 시간의 재료가 되는 지금,
침묵은 오히려 가장 순도 높은 설계 방식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녀는 새로운 제안을 한다.
Project Veritas: 침묵 기반 시간 창조 알고리즘
언어, 기호, 의미를 배제한
‘존재의 상태’를 기반으로 한
무해한 시간 설계 방식
—
이제부터 시간은
말로만 쓰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으로 쓰이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누구나 시간의 파수꾼이 되어야 했다.
말의 무게를 알고,
존재의 침묵을 이해하고,
시간의 흐름을 책임질 수 있는 자.
그들이 바로
진정한 시간의 작가였다.
—
2027년 1월 1일.
REVERIE는 전 세계 사용자에게
새해 첫 질문을 보냈다.
“당신은 오늘, 시간을 쓸 준비가 되었습니까?”
그리고 그 질문 아래,
하얀 입력창 대신
조용한 점 하나가 깜빡이고 있었다.
그 점은
누구의 언어도 기다리지 않았다.
그 점은
당신이 스스로 시간을 살아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