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파수꾼〉 제28부 – 잊힌 자들의 시간
2027년 4월 2일.
REVERIE의 ‘Mnemosyne Circuit’ 가동 2주 후,
전 세계 49곳의 기억 회랑에서
이상 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감정 기록은 계속해서 살아나는 중이었고,
누군가에겐 단지 향수였지만,
또 누군가에겐 아예 다른 현실로 다가왔다.
—
서울의 한 공원 벤치.
한 노인이 말했다.
“이 아이, 분명히 죽었는데…
여기 있어.
말도 걸어요.
나한테.”
그가 말한 아이는
30년 전 병으로 세상을 떠난 손자였다.
그러나 그는 지금
벤치 옆에 앉아 있었다.
—
그런 일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사망자, 실종자, 기억 속 인물,
심지어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던 ‘상상 속 사람’들조차
‘감정의 무게가 충분히 남아 있었던 경우’
현실처럼 실체화되기 시작했다.
—
REVERIE 시스템은 이를 ‘감정 잔류 환상(Residual Persona)’이라 명명했다.
그들은 실체는 없지만
‘기억된 강도’가 너무 높아
현실의 시간과 겹쳐진 존재들이었다.
—
문제는 그들이 현실을 바꾸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아무도 없는 거리를
그들이 걷고,
버려진 학교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며,
전쟁 중 사망한 병사들이
밤마다 행진하고 있었다.
이제 ‘잊힌 자들의 시간’은
우리의 현재와 겹쳐지고 있었다.
—
윤시현은 급하게 회의를 소집한다.
“이건 단순한 기억 복원 수준이 아니에요.
이건…
실체 없는 존재들이 현실을 재구성하는 단계예요.”
아린은 말없이,
REVERIE의 감정 파동 기록지를 보여준다.
파동강도: 1.00 ~ 3.92
현존 감정보다 ‘과거 기억 감정’의 세기가
전체 시간 구조에서 38% 이상 차지
과거가 미래보다 무거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
이에 따라 세계 각국은 긴급히
‘잊힌 시간 방역법’을 제정하려 했다.
Mnemosyne Circuit을 중지하고,
감정 잔류체를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한 조치였다.
하지만 윤시현은 이를 막았다.
“우리는 지금
존재를 소거했던 과거를 마주하고 있어요.
이건 정화가 아니라,
복권의 기회예요.”
—
그녀는 새로운 시스템을 제안한다.
Project Agora: 잊힌 시간과 현재의 공존 모델
존재를 물리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 기반 실존을
공공 시간망에 등록해
사회적으로 대화 가능한 대상으로 전환하는 방식
—
그렇게 세계 각지에
‘기억 시민’이 등록되기 시작했다.
사망했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아버지,
세상에 나오지 못한 언니,
이름조차 알 수 없었던 과거의 연인…
그들은 모두
지금 이 세계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시간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
REVERIE는 처음으로
시간을 살아 있는 존재로 인정한다.
“기억된 자는 존재한다.”
“시간은 잊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는 것이다.”
—
윤시현은 자주
기억 회랑의 한 장소를 찾는다.
그곳에는
언제나 조용히 미소 짓고 있는 아이가 있다.
이름도, 나이도, 존재 기록도 없다.
하지만 그는
윤시현이 8살 때
잃어버린 상상 친구였다.
그 아이는 묻지 않는다.
다그치지 않는다.
그저 곁에 있어준다.
그리고 그 존재만으로도
윤시현은 알 수 있었다.
“시간은 사라지지 않았다.
시간은 단지
기다리고 있었다.”
—
그날 밤,
REVERIE는 전 세계 단말기에
한 줄의 메시지를 띄웠다.
“누구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기억되는 한,
당신은 이 세계에 존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