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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파수꾼〉 제2부 – 그림자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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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파수꾼〉 제2부 – 그림자의 기억

시계탑의 거대한 문이 열렸을 때, 그 안은 상상보다 더 깊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흔한 먼지나 곰팡이 냄새도 없었고, 공기가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윤시현은 손전등을 들어 비췄지만, 빛은 몇 미터를 넘지 못하고 부서지듯 흩어졌다.

아린은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눈동자는 유리처럼 빛나고 있었다.

“기억이... 여기 있어요.”
그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리처드가 이어 들어오며 물었다.
“무슨 기억?”

아린은 머리를 감싸쥐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죽었던 순간의 기억이요.”

불과 몇 분 전, 그들은 그림자 같은 존재들과 조우했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얼굴이 없는 존재들.
그들은 일종의 시간의 방해자였다.
기억 속에 숨은 시공의 틈을 통과해 현실로 드러나는 순간, 인간의 과거를 지워버리는 존재.

“‘기억의 감시자’들은 아무것도 묻지 않아.”
카리나가 중얼였다.
“그들은 그냥... 먹을 뿐이야.”

윤시현은 파수꾼들의 오래된 문서를 떠올렸다.
‘기억의 감시자’는 존재와 시간의 경계에 생긴 상처에 흘러드는 망각의 결정체다.
그들은 흔적 없이 나타났다가, 기억과 사건을 집어삼키고 사라진다.

그들이 지키는 건 ‘사실’이 아니라 ‘비어있는 과거’였다.

시계탑 내부.

아린은 내부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며 멈췄다.
무언가 투명한 막이 가슴팍을 때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기서부터는... 시간의 벽이에요.”

윤시현이 기계장비를 들고 다가왔다.
“시간 밀도... 정상의 수천 배야. 여긴 마치, 과거가 압축된 상태처럼 보여.”

카리나가 말했다.
“그건... 기억의 밀실일 수 있어.”

기억의 밀실.
그것은 과거의 어떤 장면이 너무 강력해서, 시간 그 자체가 그 순간을 봉인하고 말아버린 상태.
보통은 사고, 비극, 혹은 존재 자체가 무너진 순간에 발생한다.

“여기 안에... 네가 죽었다는 기억이 갇혀 있는 거야?”
리처드가 아린에게 물었다.

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6살 때, 분명히 나는 죽었어요. 버려진 채 불이 난 병원 안에서. 그런데 어느 순간... 난 살아 있었어요. 그리고 ‘시간’에 대한 감각이 생겼죠.”

“그게 바로 시간 유전자라는 건가...”

윤시현은 조심스레 아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기억을 열어야 이 탑을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네가 무너지면 안 돼.”

아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기억이... 계속 말을 걸고 있어요. 마치... 누군가가 내 안에 있는 것처럼.”

기억의 밀실을 지나, 그들은 탑 꼭대기에 도달했다.
그곳엔 거대한 수정 구체가 있었고, 그 안엔 어린아이의 형상이 희미하게 앉아 있었다.

“저 아이는...”
윤시현이 입을 막았다.

그 아이는 분명히 아린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이 없었고, 입은 무언가를 말하려 애쓰고 있었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저건... 나예요.”
아린은 숨을 멈췄다.

그 순간, 수정구체가 붉게 빛났고 시계탑 전체가 진동했다.

“기억 감시자들이 몰려와!”
리처드가 소리쳤다.

그림자들은 시계탑 벽을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은 외치지도 않았고, 소리도 없었지만,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에 잊고 싶었던 과거의 장면들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카리나는 어린 시절 부모를 잃은 장면을 떠올렸고, 리처드는 동료를 실험 실패로 잃은 과거에 무너졌다.
윤시현도, 자신이 실험으로 동생을 식물인간으로 만든 기억이 되살아나 무릎을 꿇었다.

그 와중에도 아린은 그 아이에게 다가갔다.

“네가 나지...?
아니, 네가 나를 대신해 죽은 아린이지.”

그 순간, 아이의 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아린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난 네 기억이야. 너는 도망쳤고, 나는 남았어.
너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태어났고, 나는 정지된 순간에 갇혔어.”

“왜 날 불렀어...?”

“이제 돌아와야 해.
너의 기억을... 되찾아야만, 진짜 ‘시계탑의 비밀’을 알 수 있어.”

그 순간, 시계탑 바깥에서 거대한 붉은 빛이 일렁였고, ‘크로노스 대대’가 특수 장비를 들고 나타났다.

그들은 감시자들을 가두기 위해 시공 파동 억제기를 설치했고, 윤시현에게 외쳤다.
“30초 안에 나와! 여기 무너지기 시작해!”

하지만 아린은 수정 구체 안으로 걸어 들어가 버렸다.

“아린!!!”

그 순간, 수정이 깨지고, 시계탑 전체가 무너졌다.

윤시현과 나머지 팀은 간신히 탈출했지만, 탑은 그대로 사라졌다.
그 자리에 남은 건, 아린이 입고 있던 회색 재킷뿐이었다.

베를린 연구기지, 그로부터 3일 후.

윤시현은 아린의 재킷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아이는... 그 시계탑의 ‘핵’이었어. 그리고 지금, 아린은 그 중심으로 들어갔어.”

카리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탑.
그 탑이 사라졌다는 건... 아린이 그 기억과 완전히 하나가 됐다는 뜻이야.”

리처드는 데이터 로그를 보여주며 말했다.
“하지만 신호는 아직 살아 있어.
아린의 생체 리듬이... 다른 시간대에서 감지되고 있어.”

“다른 시간대?” 윤시현이 물었다.

“그래.
아린은 이제... 다른 시간층에 존재해.
우리가 접근할 수 없는 과거의 틈, 그 ‘균열’ 속에서 말이야.”

그날 밤, 윤시현은 혼자 연구실에 남아 회색 재킷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너는 내게 말했지. 기억은 시간의 문이라고.
그 문을 열 수 있다면... 모든 비극도 다시 바꿀 수 있다고.
그렇다면... 이번엔 내가 그 문을 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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