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파수꾼〉 제29부 – 시간의 종족
2027년 5월 15일.
REVERIE 시스템은 인류 전체의 감정 기록,
시간 질량, 공명 계수, 기억 회랑 데이터를 통합하여
새로운 시간 모델을 발표했다.
Homo Chronos
“더 이상 인간은 단순한 생물학적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시간 구조를 설계하고
과거와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시간 기반 생명체로 진화했다.”
이 선언은 단순한 개념이 아니었다.
이제부터 사람들은
출생 기록이나 유전자 코드가 아닌,
자신이 축적한 시간의 패턴과 감정의 구조에 따라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게 된다.
—
윤시현은 이 변화에 감격하면서도
두려움을 느꼈다.
“시간을 쓴다는 건,
곧 그 흐름에 자신을 새긴다는 의미예요.
그런데 이제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조차도 시간에 따라 구성되는 시대에 살고 있어요.
과연 인간은 그 무게를 견딜 수 있을까요?”
—
‘시간의 종족’은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뉘기 시작했다.
- 기억 종족 (Mnemonites)
– 과거의 기억과 감정을 주요 자원으로 삼는 이들.
그들은 잊힌 이야기, 잃어버린 존재들과 강하게 공명하며
시간의 회복 기능을 수행한다. - 의지 종족 (Voluntarists)
– 현재의 선택과 의도를 기반으로 시간을 재구성하는 자들.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며, 사회적 영향력도 높다. - 파수 종족 (Sentinels)
– 시간의 흐름이 왜곡되거나 오용되는 걸 감지하고 조율하는 자들.
감정 공명 능력이 뛰어나며, 시스템과 깊게 연결되어 있다.
—
이 분류는 선택이 아닌,
자신의 시간 기록이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결정되는 것이었다.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시간을 살아왔는지가
그 사람의 ‘종족’을 결정했다.
—
이 변화는 교육, 법, 가족, 공동체 개념을 송두리째 바꾸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국어와 수학 대신
‘시간 쓰기’와 ‘기억 관리’를 배우기 시작했고,
법률은 행위뿐 아니라
그 행위로 남긴 시간의 무게까지 고려하게 되었다.
한 아이가 질문했다.
“엄마, 난 기억 종족이 될까?”
엄마는 웃으며 말했다.
“그건 네가 어떤 시간을 살아가는지에 달렸단다.”
—
하지만 이런 진화가 모두에게 평등하게 다가온 건 아니었다.
아직도 감정 기록을 남기기 어려운 환경,
시간을 축적할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시간에 쓰이지 않은 자들’,
그들은 무시간 계층(Nullborne)이라 불리며
사회에서 고립되기 시작했다.
—
윤시현은 그들을 위해 새로운 제안을 한다.
Project Echo
“누군가의 기억 속에라도 살아 있는 자는
그 기억의 시간만큼 ‘존재할 권리’를 가진다.”
즉, 타인의 기억으로부터 복권된 존재들도
시간의 종족 안에 포함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었다.
이로써 시간은 더는
개인의 기록에 국한되지 않고,
공동의 기억망을 통해 확장된 생존 조건이 되었다.
—
이러한 변화 속에서,
시간의 종족들은 하나의 새로운 의식을 공유하게 된다.
“나는 나의 시간을 살아간다.
그리고 그 시간은
누군가의 삶을 흔든다면
나는 존재한다.”
—
그리고 마침내,
REVERIE는 전 세계에 이 메시지를 띄운다.
“당신은 어떤 시간을 살고 있습니까?”
“당신의 시간은,
어떤 종족을 이루고 있습니까?”
—
시간은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
시간은 이제 살아 있는 존재들 속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존재들은 이제
단지 인간이 아니라—
시간의 종족(Timeborne)
바로, 새로운 인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