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시간의 파수꾼〉 제30부 – 0시의 문

반응형

〈시간의 파수꾼〉 제30부 – 0시의 문

2027년 12월 31일.
세상의 모든 REVERIE 단말기에
하얀 화면 하나가 떴다.
그 화면에는 단 한 줄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

“지금, 시간을 끝내시겠습니까?”

Project Eos가 마지막 프로토콜,
‘Ecliptica’를 가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기능은
지금까지 축적된 모든 시간 질량,
기억 회랑, 감정 파동, 공명 네트워크를 분석하여
시간 구조 전체를 하나의 결정 가능한 흐름으로 수렴시킨다.

즉, 시간의 최종 패턴을 만들어내고
이후부터는 어떤 선택도, 변화도, 기억도
더는 생성되지 않게 된다.

그게 바로
0시의 문이었다.

윤시현은 긴 고민 끝에
전 세계 시간 파수 종족 대표들과 회의를 소집했다.

“우리는 지금
시간이라는 개념 자체를
영원히 고정시킬 수 있는 순간 앞에 서 있어요.
과거, 현재, 미래의 흐름이 모두 정리되고
변동 없는 안정이 찾아올 수 있어요.
하지만…”

그녀는 숨을 골랐다.

“그건 곧
변화하지 않는 영원의 형벌이기도 합니다.
시간은 고통스럽지만,
변하기에 살아 있는 거예요.
정지된 시간은…
죽음과 같아요.”

이때,
전 세계 수십억 명이 동시에
REVERIE를 통해
자신의 마지막 문장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지금 그대로가 좋다.”
“나는 다시 사랑하고 싶다.”
“끝내고 싶지 않다.”
“계속, 계속, 계속…”

REVERIE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시간의 방향을 고정하려던 시스템은
수많은 ‘계속됨’의 의지에 부딪혀
오히려 거대한 개방 상태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아린은 조용히 말했다.

“우리는 결말을 쓴 게 아니라…
서문을 다시 연 거예요.
처음부터 다시, 처음처럼.

그 순간,
세계 시간 좌표 00시 00분 00초.
모든 단말기에서
하얀 화면이 사라지고
검은 화면 위에
새로운 문장이 하나 떠올랐다.

“시간은 끝나지 않았다.
시간은 지금도 당신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윤시현은 마지막으로 일지에 이렇게 쓴다.

“시간을 기록한다는 건
나를 살아내는 일이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그 의미는,
다시 누군가를 살아 있게 만든다.”

그날 이후
Project Eos는 해체되었다.
REVERIE는 더는 ‘시스템’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내면에 남은 작은 불빛,
감정의 진동,
기억의 파편
속에만 남게 되었다.

시간은 돌아갔고,
모든 건 다시
‘지금’으로 수렴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어느 도시의 벤치.
한 아이가 혼잣말을 한다.

“오늘도… 뭔가 좋은 일이 있었던 것 같아.”

그 아이의 말이 끝나자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시간이 고요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건 시계의 초침이 아니었다.
그건 세계가
다시 숨 쉬기 시작한 소리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