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시간의 파수꾼〉 제3부 – 시간의 균열

반응형

〈시간의 파수꾼〉 제3부 – 시간의 균열

0.0001초.
그 시간 동안 아린은 낙하했다.
무너지는 시계탑 속 붕괴된 공간을 지나, 그는 검은 틈 사이로 빨려들어갔다. 마치 현실과 비현실의 틈새에 있는, 물리법칙이 작동하지 않는 곳.

그리고 그가 도달한 장소는 ‘시간의 바깥’이었다.

거긴 어떤 감각도 존재하지 않았다. 색이 없고, 냄새도 없고, 중력도 없고, 심지어 언어도 닿지 않았다.
단 하나, 소리 없이 진동하는 기억들만 떠다녔다.
가장 오래된 기억, 가장 지워진 기억, 가장 원초적인 기억들이.

그 중 하나가 아린에게 다가왔다.
그 기억은 열기 어린 불빛 속 병원 복도였고, 울부짖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깃들어 있었다.

“이건...”
아린은 말할 수 없었지만, ‘인식’했다.
자신이 죽었다고 믿었던 그날 밤.

그러나 기억은 다른 결말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날, 병원에 불이 나기 전,
누군가가 아린을 들어 올리고 문 뒤로 데려갔다.
그 사람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고, 시계의 초침 소리와 함께 등장했다.

그리고 그 순간,
아린은 다시금 시간의 균열 너머로 밀려났다.

동시에 현실 세계, 서울.
윤시현은 베를린 시계탑 사건 이후 잠시도 쉬지 않았다.

그녀는 크로노넷에서 수집한 데이터를 역추적하고 있었다.
파수꾼 내부에서도 그녀의 행동은 위험한 단독 행위로 여겨졌지만, 아무도 그녀를 막지는 않았다.
그녀는 단지 과학자가 아니라, 이제 ‘균열 추적자’였다.

그녀는 아린의 마지막 신호가 남긴 파동을 정밀하게 추적한 끝에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시간의 균열은 자연현상이 아니야.
누군가가 만든 ‘문’이야.”

윤시현은 지도에 붉은 점들을 찍으며 중얼거렸다.
“브뤼셀, 하얼빈, 예루살렘, 그리고 서울...
모두 시계탑이 있던 도시.”

그녀는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
각 도시의 시계탑은 19세기 후반에 동일한 설계자가 만든 것이었다.
정체불명의 건축가, 이름도 없는 기록. 다만, 그가 남긴 도장은 모래시계가 거꾸로 뒤집힌 문양이었다.

“크로노스 대대...”
그 이름이 다시 떠올랐다.

윤시현은 서울 낙산 자락에 위치한 오래된 시계탑을 찾았다.
지금은 폐허가 되었고, 지도에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장소.
하지만 안으로 들어서자, 낡은 시계의 초침이 천천히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이 흐르고 있어...
하지만 이건 지금 시간이 아니야.”

그녀는 장비를 꺼내 시간 밀도를 측정했다.
수치는 음의 값이었다.
시간이 과거를 향해 되감기고 있다는 뜻.

그 순간, 시계탑 내부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림자 하나가 떨어졌다.

“누구지?”

그림자는 한 남성이었다. 피투성이였고, 숨이 가빴다.
그는 제복을 입고 있었지만 반쯤 찢겨 있었고, 가슴팍엔 거꾸로 된 모래시계 문양이 남아 있었다.

“당신... 크로노스 대대 소속인가요?”

남자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우린... 실패했어...
문을 열었고, 그 안에 들어간 자들은... 기억을 잃었어.
그리고, 그리고...”

그는 말하다가 입을 벌렸고, 그 안에서 하얀 연기가 흘러나왔다.
그건 무언가 살아 있는 듯, 윤시현을 향해 뻗쳐왔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방어막을 켰지만, 연기는 벽을 통과해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순간, 그녀는 아린의 기억을 보았다.
아린이 울고 있는 장면,
불타는 병원,
그리고 그 아이를 데려가던 ‘남자’.
그 남자는 시간을 거슬러 움직이고 있었고, 그의 눈동자는...

“나랑 똑같아...”
윤시현은 숨을 멈췄다.

다시 시간의 균열 속.
아린은 자신이 도달한 공간이 ‘과거의 틈’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여기엔 수많은 잊힌 사람들의 흔적이 떠다니고 있었고, 그 중 일부는 인간의 형체를 하고 속삭이고 있었다.

“너도 잊혀지면, 이곳에 남게 될 거야.”

그 속삭임 속에서 한 사람이 다가왔다.
그 남자는 모자를 쓰고 있었고, 회색 재킷을 입고 있었으며, 아린과 똑같은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너는 누구야...?”

그 남자는 말했다.
“나는 시간의 설계자.”

“무슨 말이지?”

“널 살려낸 건 나야.
너의 죽음은 설계된 사건이었고, 너는 시간 속에 숨겨진 열쇠였지.”

“왜 나야?”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아린의 이마에 손을 대자 그 안에 수많은 기억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속에는 수십 년 전, 수백 년 전의 기억도 있었고, 윤시현의 얼굴도 있었다.

“이제 곧 문이 열릴 거야.
기억의 심층에 있는 ‘진짜 시계’가 다시 작동하면, 시간의 구조는 바뀔 거야.
넌 그것을 멈출 유일한 존재야.
왜냐하면 너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자’니까.”

현실로 돌아온 윤시현은 결정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다음 균열은 ‘예루살렘 시계탑’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커.
그곳에서 문을 통과할 수 있는 장비를 만들겠어.”

그녀는 파일을 정리하며 팀원들에게 전송했다.
그 제목은 단순했다.

[계획명: 크로노 게이트]
목표: 시간의 균열을 넘어 아린을 복원한다.

그날 밤, 윤시현은 꿈을 꾸었다.
그 꿈속에서 아린은 손을 내밀고 있었다.

“기억을 버리지 마요.
기억은, 시간이 말을 거는 방식이에요.”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