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파수꾼〉 제4부 – 크로노 게이트
새벽 4시, 서울 외곽 비밀 연구소.
윤시현은 36시간 동안 한숨도 자지 않았다.
크로노 게이트—시간 균열을 통과할 수 있는 최초의 인공 장치.
그녀는 이 장치를 만들기 위해 전 세계에서 단 5명만이 다룰 수 있다는 양자파동 시정기, 기억인식 매핑센서, 그리고 인간의 뇌파를 동기화할 수 있는 초고밀도 네트워크 유닛까지 끌어다 조립 중이었다.
그녀의 손은 떨리고 있었고, 눈 밑은 검게 꺼져 있었지만, 눈동자만큼은 살아 있었다.
“이건 단순한 기계가 아니야.
이건 ‘기억’을 재구성해 균열 너머의 시간과 접속하는 문이야.”
카리나가 물었다.
“그렇다면... 시간 속으로 진입하는 건 우리 중 누가 해?”
윤시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데이터맵을 열었다.
그 안에는 아린의 뇌파 구조와 유사한 패턴을 지닌 인물이 단 한 명, 등록되어 있었다.
바로 윤시현 자신이었다.
“내가 들어갈 거야.”
“말도 안 돼.”
리처드가 고개를 저었다.
“네 뇌는 아린처럼 시간 유전자를 갖고 있지 않아. 균열 안에서 무너질 수 있다고.”
“아니, 나도 가지고 있어.”
윤시현은 고개를 들었다.
“10년 전, 나 역시 ‘시계탑’에 다녀왔어.”
—
그녀는 말하지 않았던 자신의 과거를 꺼냈다.
2005년, 그녀는 오사카 교환연구 프로젝트 중, ‘미나미 구역’의 낡은 시계탑을 연구하다 의식 불명 상태에 빠졌고, 2주간 혼수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 이후, 그녀는 시간을 ‘이상하게 느끼는’ 감각을 갖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현재의 사건을, 때때로 과거처럼 인식했어.
사람들이 한 말을 듣기 전부터 알아버리는 순간이 있었고,
내가 보지 못했던 기억이 꿈처럼 떠오르곤 했지.”
그녀는 천천히 손을 올려 크로노 게이트 장치에 자신의 기억 매핑 코드를 입력했다.
기계가 미세하게 진동했고, 그 중심에는 ‘시간의 틈’을 시각화한 곡선의 윤곽이 떠올랐다.
그건 마치, 꿈속에서 본 시계탑의 입구처럼 보였다.
“이 문을 통과하면, 난 더 이상 지금 여기에 있지 않게 돼.
하지만 그 안에서 아린을 찾아, ‘핵’을 복원할 수 있다면...
우리는 모든 균열을 되돌릴 수 있어.”
—
장치의 가동 준비는 총 47단계로 이루어졌다.
윤시현은 그 단계를 하나씩 체크해가며, 동기화를 시작했다.
기억 매핑, 신경 통합, 시간 인식 억제 해제, 심박-리듬 보정, 균열 중심점 초점 맞춤...
마지막 단계에서, 시스템이 경고음을 냈다.
[주의: 진입 대상의 과거 기억 중 일부 ‘불안정’ 상태 감지됨.]
그녀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확인 버튼을 눌렀다.
“괜찮아. 그 기억은... 내가 반드시 마주해야 해.”
—
진입이 시작되자, 주위 공간이 뒤틀렸다.
크로노 게이트는 윤시현의 뇌파 신호를 따라 기억의 구조 속으로 진입했고, 그녀의 의식은 시간의 틈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첫 번째로 도달한 공간은 그녀가 12살이던 어느 여름날 오후였다.
그녀는 언니와 함께 폐가에서 놀고 있었고, 무심코 들어간 지하실 안에 작은 시계탑 조형물이 있었다.
그 시계는 정확히 3시 33분 33초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 시계를 만졌을 때, 언니가 비명을 질렀다.
“시현아, 거기서 나와! 안 돼!”
순간, 불빛이 터지고 기억이 전환되었다.
—
다음 기억은 실험실.
윤시현이 동생의 병을 고치기 위해 수행한 금지된 시간 억제 실험.
그녀는 시간을 조작해 세포의 노화를 역전시키려 했고, 그 과정에서 동생은 의식 불명 상태가 되었다.
그 기억 앞에서, 그녀는 주저앉고 싶었다.
하지만 아린의 목소리가 균열 속 어딘가에서 들려왔다.
“기억을 마주하면, 시간이 말하기 시작해요.”
—
세 번째 기억은 존재하지 않았던 장면이었다.
윤시현이 기억하지 못했던 시간.
그녀가 혼수 상태였던 2주간, 시계탑 안에서 누군가와 대화하고 있던 장면.
그 남자.
모자와 회색 재킷, 시간의 설계자.
“넌 나와 같아.
과거에 존재하지만, 현재를 바꿀 수 있는 존재.
너와 아린은, ‘시간의 열쇠’와 ‘문지기’야.”
“왜 우리죠?”
“우리는 모두 기억 속에서 태어난 존재니까.
우리는... 시간 그 자체가 만든 질문이야.”
—
그 순간, 균열이 흔들렸다.
시계탑의 잔해가 허공에 떠오르고, 윤시현은 균열 안쪽으로 더 깊이 빨려들어갔다.
그곳, 가장 아래에... 아린이 있었다.
그는 여전히 아이의 모습을 한 채, 수정 속에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는 윤시현이 다가가자, 천천히 떠졌다.
“기억의 문을... 열었군요.”
윤시현은 숨을 삼키며 다가갔다.
“너를 데리러 왔어.
넌 여기서 빠져나와야 해. 우리가 돌아가야 할 시간이 있어.”
아린은 고개를 저었다.
“이곳은 기억의 심층이에요.
나 혼자선 나갈 수 없어요.
하지만 당신이... 저와 기억을 공유하면, 문이 열릴 거예요.”
—
크로노 게이트 외부, 장치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리처드가 모니터를 확인하며 외쳤다.
“이상해! 시간 진입선이 바뀌고 있어! 시현이... 균열 중심으로 끌려가!”
카리나가 주저 없이 달려가 방어 필드를 확장했다.
“계속 연결을 유지해! 끊기면 시현은 그대로 기억 속에 갇히게 돼!”
—
균열 내부.
윤시현은 아린과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기억이 다시 흘러들었다.
그 안에서, 그녀는 아린이 살아난 이유를 보았다.
아린은 우연히 살아난 것이 아니었다.
그의 탄생과 죽음은 윤시현의 시간실험에 의해 비틀린 사건이었다.
그녀는 그제야 깨달았다.
“넌... 나로 인해 태어난 존재였구나.”
아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시간의 파편이에요.
그리고 이제... 당신이 문을 닫아야 해요.”
—
윤시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기억의 흐름 속에서, 시계탑의 문을 닫는 장치를 가동시켰다.
순간, 균열이 무너졌고 시공의 흐름이 다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현실에서, 크로노 게이트의 진입 포탈이 붕괴되기 직전,
윤시현과 아린의 두 개의 뇌파가 동기화된 패턴으로 수렴했다.
—
그리고 빛이 터졌다.
—
몇 분 후.
연기와 전기 스파크가 가라앉은 실험실 한가운데, 두 사람의 형체가 나타났다.
윤시현과 아린.
둘은 기억의 일부를 공유한 채,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우린 돌아왔어.”
아린이 말했다.
윤시현은 고개를 들고 중얼거렸다.
“이제... 다음 문을 향해 가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