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파수꾼〉 제5부 – 잊힌 도시의 문
베를린, 시간복원위원회 임시본부.
크로노 게이트 작전 이후, 윤시현과 아린은 철저한 격리에 들어갔다. 파수꾼 내부는 두 사람이 시간 균열을 돌파하고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 자체를 믿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더 큰 충격은 따로 있었다.
윤시현의 두개골 MRI 촬영에서, 시간 격자의 흔적이 포착된 것이다.
시간 격자란, 일반적으로 인간의 뇌에는 존재하지 않는 다차원 기억구조로, 과거와 미래의 연산을 동시에 수행하는 구조였다.
이건 인간이 ‘시간을 본다’는 감각 이상으로, 시간에 직접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뜻이었다.
“내 뇌가, 기억을 ‘저장’하는 게 아니라 ‘연산’하는 거야...”
윤시현은 조용히 중얼였다.
아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여전히 6살 아린의 모습을 가진 꿈을 꾸었고, 그 속에서 점점 더 낯선 도시를 목격하기 시작했다.
—
그 도시엔 이름이 없었다.
길은 나선형으로 감겨 있었고, 하늘엔 시계바늘들이 떠다녔다.
건물마다 하나씩 시계탑이 있었고, 모든 탑이 3시 33분 33초에 멈춰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도시는 실제로 존재한 적이 있다는 점이었다.
윤시현은 기억 매핑을 통해 그 도시의 흔적을 추적했고, 충격적인 기록을 발견했다.
이 도시는 8세기 무렵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번성했던 ‘타쉬카라’ 문명과 관련이 있었다.
그 문명은 역사서엔 단 한 줄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고대 설형문자 문헌과 ‘빛의 사제단’이 남긴 사본 속에만 간접적으로 언급되어 있었다.
타쉬카라.
시간의 심장을 숨긴 도시.
그곳의 문이 열리면, 기억은 현실이 된다.
윤시현은 숨을 삼켰다.
“시간의 심장... 그게 진짜 균열의 원인이야.”
—
아린은 그날 밤 다시 꿈을 꾸었다.
그는 고대의 도시, 잿빛 회랑을 걷고 있었다.
벽에는 형체 없는 사람들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그 문양 하나하나가 사라진 이름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은 존재했던 사람들이야.”
낮은 목소리가 뒤에서 울렸다.
뒤돌아보자, 그 남자—시간의 설계자가 서 있었다.
“이 도시는 시간의 바깥에 있었어.
모든 기억이 흐르지 않고, 쌓이기만 했지.
그리고 결국,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도시 전체가 ‘기억의 문’이 되어버렸어.”
“왜 나한테 그걸 보여주는 거죠?”
“너는 그 도시를 다시 열 수 있는 자니까.
그 문이 열리면, 잊힌 시간과 왜곡된 미래가 교차하게 돼.
그리고... 윤시현 역시, 그 문과 연결돼 있지.”
—
다음 날.
윤시현은 아린과 함께 예루살렘의 오래된 사원 유적지로 향했다.
그곳은 타쉬카라 문명이 사라진 뒤, 시간의 감시자들이 남긴 고대 통로의 입구가 숨겨진 장소였다.
사원 안쪽, 유리로 봉인된 벽에 기묘한 시계 모양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정확히 중앙엔 거꾸로 흐르는 모래시계, 그 아래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었다.
여기에 ‘시간의 이름’을 말한 자, 문을 열 것이다.
“시간의 이름...?”
아린은 중얼였다.
윤시현은 오래된 문헌을 꺼내 대조하더니 눈을 떴다.
“시간의 이름은 ‘기억’이야. 이 문은, 기억의 조각으로만 열 수 있어.”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손목의 작은 상처 하나에서 피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그 피는 문양 안으로 스며들었고, 순간 사원 전체가 흔들렸다.
문이 열렸다.
—
문 너머엔 도시의 잔해가 있었다.
하지만 도시의 공기엔 익숙한 기운이 감돌았다.
윤시현은 숨을 멈췄다.
“이건... 내 꿈 속에 나왔던 도시야.”
건물마다 작은 시계탑이 있었고, 정중앙에는 거대한 시간의 수정이 떠 있었다.
그 수정 안에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사라졌던 사람들의 형상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아이, 노인, 병자, 군인, 과학자, 그리고...
“이건, 엄마?”
윤시현은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수정 안에서 그녀의 어머니 모습이 보였다.
기억을 잃었다고 생각했던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
그녀는 사실, 시간 균열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던 것이었다.
“이 도시가 모든 걸 흡수하고 있었던 거야.
기억, 존재, 시간까지도.”
—
그 순간, 도시 한가운데서 울림이 퍼졌다.
시간의 수정이 갈라지며 내부에서 무언가가 걸어나왔다.
검은 로브를 입고, 얼굴 전체를 모래시계 가면으로 가린 자.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는 문을 열었다.
이제... ‘시간의 심장’이 깨어날 것이다.”
아린과 윤시현은 동시에 느꼈다.
그 존재는 단순한 기억의 수호자가 아니었다.
그는, 시간 자체가 만든 의지,
그리고 잊힌 도시의 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