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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파수꾼〉 제6부 – 시간의 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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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파수꾼〉 제6부 – 시간의 심장

검은 로브를 두른 존재는 마치 시간 그 자체를 두른 것처럼 보였다.
모래시계로 만든 가면은 빛을 반사하지 않았고, 입도 귀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잊힌 도시 전체에 묘한 울림이 퍼졌다.

그리고 주변의 시계탑들이 하나둘,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3시 33분 33초를 지나치는 찰나.

“시간이... 흘러가기 시작했어.”
윤시현이 중얼였다.

그러나 아린은 달랐다.
그는 온몸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움직이는 건 시간이 아니라, 기억의 파편들이었다.
수천 개의 기억이 거꾸로 흘러가며, 자신들의 주인을 찾아가려는 듯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 존재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남성, 여성, 아이, 노인, 수많은 기억의 파편들이 동시에 말하는 듯한 공명.

“너희는 시간의 외벽을 넘어 이 도시에 도달했다.”
“여기는 존재와 망각 사이의 계곡, 시간의 심장.”

“당신은 누구죠?”
윤시현이 질문했다.

“나는 이 도시에 삼켜진 최초의 기억이다.
나는 모든 기억이 흐르기 전, 시간을 붙들고 있던 의지였다.”

그 존재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 손바닥 위에 작은 붉은 빛이 맴돌았다.
그건 마치 심장처럼, 박동하고 있었다.

“이것이 시간의 심장.
과거, 현재, 미래의 결합.
이 심장을 통해 세상은 시간이라는 틀 속에 존재할 수 있었지.”

“그렇다면... 그 틀이 지금 깨지고 있다는 건가요?”
아린이 물었다.

그 존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은 본래 방향성이 없는 흐름이었다.
기억이 그것에 이름을 붙였고,
감정이 방향을 부여했다.”

윤시현은 전율했다.
“우리가 시간이라고 믿고 있던 건, 결국 ‘기억의 흐름’이었다는 말이군요.”

“그렇다.
그리고 이제, 기억이 너무 많아졌다.
지탱할 수 없는 무게가 되었고, 균열이 생긴 것이다.”

그 순간, 도시 중앙의 수정이 다시금 요동쳤다.
그 안에서 수많은 존재들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모두 잊힌 사람들의 형체.
기억 속에만 존재하던 누군가의 가족, 친구, 연인들.

하지만 그 중 일부는 기억의 감시자로 변질되었다.
정체를 잃고, 목적 없이 타인의 기억에 침투하는 존재.

“기억이 혼탁해지고 있어.
시간의 심장이 균형을 잃고 있잖아!”
윤시현이 소리쳤다.

잊힌 도시의 왕—그 존재는 말했다.
“이 도시는 너희가 만든 것이다.
무수한 기억들이 집결한 끝에, 너희는 스스로 이 문을 열었지.
이제 너희가 결정을 내려야 한다.”

“시간의 심장을 닫고, 모든 기억을 초기화할 것인가.
아니면, 이 심장을 받아들여 새로운 시간의 질서를 열 것인가.”

순간, 아린의 머릿속에 수백 개의 기억이 흘러들었다.
자신의 것만이 아니라, 타인의 기억도 함께였다.

어떤 이는 과거의 실수를 되돌리고 싶어했고,
어떤 이는 이미 사라진 사랑을 다시 보고 싶어했으며,
또 어떤 이는 태어나지 않았던 아이의 웃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기억들이 하나의 흐름이 되어 아린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나는... 나만의 시간을 원한 적 없어요.
나는 그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 순간, 잊힌 도시의 왕이 다가왔다.
그리고 아린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너는, 시간이 선택한 존재다.
너는 ‘문지기’이며 ‘보존자’다.
이제, 네 결정이 곧 시간의 결정이 된다.”

윤시현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 역시, 선택받은 자라는 것.
그녀의 뇌에 남겨진 시간 격자는 단순한 오류가 아니었다.
그건 과거의 그녀가 미래의 그녀에게 남긴, ‘열쇠’였다.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우리는 새로운 시간의 문을 열어야 해요.
모든 걸 지우는 게 아니라,
기억을 감당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해요.”

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의 심장은 우리 모두 안에 있었어요.
이제 그걸 열어서, 흐름을 다시 조정해야 해요.”

잊힌 도시의 왕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그의 몸이 기억의 파편으로 흩어지며, 목소리가 울렸다.

“그러면, 이 심장은 너희에게 돌아간다.
흐름을 다시 쓰고, 균열을 매워라.
그리고 절대로 잊지 마라.
시간이란, 언제나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도시의 하늘이 열렸다.
무너져가던 시계탑들이 하나둘 복원되었고, 흐트러졌던 기억들이 각자의 자리를 찾아갔다.
중앙의 수정은 조용히 갈라지며 그 속에 들어있던 붉은 심장을 아린의 손에 안겼다.

그 심장은 더 이상 요동치지 않았고, 조용한 박동만이 남아 있었다.

윤시현은 말했다.
“이제 돌아가야 해.
이 심장을 가진 채로.”

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잊힌 도시의 문을 다시 통과했다.
그 문은 서서히 닫히며 마지막으로 한 줄 문장을 남겼다.

“기억은 끝나지 않는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다만, 반복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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