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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파수꾼〉 제7부 – 시간의 전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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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파수꾼〉 제7부 – 시간의 전염

서울, 크로노 연구본부.
윤시현과 아린은 잊힌 도시로부터 돌아온 지 일주일째였다.
그들이 가져온 ‘시간의 심장’은 검은 케이스에 보관되어 있었고, 수십 개의 보호장치와 억제장치가 부착된 채 엄중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돌아온 바로 다음 날부터, 전 세계 곳곳에서 이상한 사건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런던.
교통사고를 당한 환자가 깨어나자, 30년 전 실종된 인물과 똑같은 기억을 말했다.

도쿄.
초등학생들이 ‘이미 일어난 내일의 일’을 묘사하며, 정부기관의 움직임을 정확히 예측했다.

요하네스버그.
폐쇄된 고철창고에서 19세기 언어를 쓰는 남자가 발견되었다. 그는 자신이 1841년에 이곳에 도착했다고 주장했다.

윤시현은 이 모든 사건의 공통점에 주목했다.
그 모든 사람들은, 아린과 비슷한 형태의 시간 왜곡 파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감염이야.”
그녀는 마침내 그렇게 결론지었다.

“시간의 심장은 단순히 고정된 물체가 아니야.
그건 흐름 그 자체야.
그리고 지금, 그 흐름이 사람을 통해 퍼지고 있어.”

아린은 그 말을 듣고 침묵에 빠졌다.
그는 손목에 부착된 측정 장치를 내려다보았다.
그 수치는 점점 높아지고 있었고, 그의 신체에서 시간 동조파가 주기적으로 방출되고 있었다.

“그럼... 나도 감염된 건가요?”

윤시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넌 ‘전파자’야.”

그 말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시간의 심장은 너와 연결되어 있어.
넌 그것을 들고 왔고, 너의 기억은 심장과 융합되었지.
이젠 너의 존재 자체가, 주변 세계에 시간의 잔향을 흘려보내고 있는 거야.”

크로노 위원회는 위기 대응 회의를 소집했다.
리처드, 카리나, 그리고 전 세계의 파수꾼 대표들이 연결된 긴급 통신망에는
지금 벌어지는 시간왜곡 현상을 ‘크로노 인플루엔자’, 즉 시간의 전염이라 명명하고 있었다.

[리처드]: 감염자들은 공통적으로, 일정 시간대의 기억을 반복해서 떠올리고 있어.
[카리나]: 기억에 반복되는 패턴이 생기면, 그것이 고정된 시간대의 틈을 열어. 그게 균열을 다시 퍼뜨리고 있어.

윤시현은 이를 정리하며 말했다.
“결국, 시간은 감정과 기억을 통해 사람에게 ‘기생’하는 형태로 진화하고 있어요.
우린 지금, 처음 보는 형태의 전염병을 맞이한 거예요.
그 병의 매개체는 추억이고, 증상은 시간의 붕괴예요.”

그날 밤.
아린은 꿈에서 다시 잊힌 도시를 보았다.
하지만 그 도시는 예전의 조용한 황혼빛이 아니었다.
도시는 붉은 안개로 가득 차 있었고, 모든 시계가 거꾸로 돌고 있었다.

그리고 시계탑 아래, 한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렸고, 아린은 숨을 멈췄다.
그 여인은 윤시현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보다 더 젊었고, 더 고요했으며, 눈동자는 완전히 빛을 잃고 있었다.

“시현...?”

그녀는 말했다.
“이건 반복이야.
나는 이곳에서 널 기다렸고,
너는 다시 이 문을 열었어.”

그 순간, 아린의 눈이 열리며 현실로 돌아왔다.
온몸에 땀이 흘러내렸고, 손바닥에는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시간은 물러서지 않아.
단지 우리를 삼킬 뿐이다.”

다음 날, 대한민국 제주도에서 시간 고정 현상이 보고되었다.
동일한 파도가 해변에 2시간 넘게 반복해서 밀려오는 영상이 인터넷에 퍼졌고,
그 장소에 있던 사람들 중 7명이 동일한 꿈을 꿨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아린은 충격을 받았다.
“내가 간 적도 없는 장소에서... 내 꿈이 퍼지고 있어요.”

윤시현은 결단을 내렸다.
“이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시간의 심장을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려야 해.
하지만 그냥 두면 아무 의미 없을 거야.
그 심장을, 우리 손으로 봉인해야 해.”

작전명은 ‘코드: 리셋’.
목표는 시간의 심장을 과거의 틈에 되돌리고, 그 흐름을 닫는 것.
그러기 위해선 다시 한 번 ‘잊힌 도시의 문’을 통과해야 했다.
하지만 이번엔 균열이 훨씬 더 넓어졌고, 도시 자체가 감염되어 있었다.

윤시현은 마지막으로 연구기지의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번엔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걸 하지 않으면...
우리 모두는 반복되는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될 거예요.”

그날 밤, 아린과 윤시현은 다시 한 번 ‘시간의 문’ 앞에 섰다.
이번엔 모래시계 문양 대신, 누군가의 손글씨가 문에 새겨져 있었다.

“시간을 막으려 하지 마라.
시간은 너를 기억한다.”

그 말은, 누군가의 경고처럼 느껴졌다.

윤시현은 조용히 대답했다.
“그래도, 우린 지나갈 거야.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문이 열렸다.
붉은 안개와 시계탑의 거꾸로 도는 바늘 소리,
그리고 저 멀리, 시간의 심장이 다시 깨어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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