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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파수꾼〉 제8부 – 기억의 반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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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파수꾼〉 제8부 – 기억의 반역자

문이 열리고, 윤시현과 아린은 다시 그 도시에 발을 들였다.
하지만 처음과는 달랐다.
도시는 완전히 뒤틀려 있었다.

건물들은 하늘을 향해 뒤집혀 있었고, 시계탑은 무너진 채 바늘이 허공에서 멈춘 듯 떠 있었다.
공기 중엔 붉은 안개와 함께, 기억의 조각들이 떠다녔다.

과거의 파편,
사라진 사람들의 환영,
되돌릴 수 없는 선택들이 조각처럼 흩어져 도시 위를 맴돌고 있었다.

“여기 완전히... 감염됐어요.”
아린이 숨을 죽였다.
그의 손끝이 떨렸다.
시간의 심장이 그의 내부에서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이 도시 안의 기억이 날 인식하고 있어요.
그리고... 뭔가가 절 부르고 있어요.”

윤시현은 조심스럽게 주변을 스캔했다.
장비는 아무런 신호도 잡지 못했다.
이곳에선 이성과 과학의 법칙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들은 도시 중심부로 향했다.
예전엔 수정이 떠 있었던 광장.
지금은, 그 자리에 붉은 색의 웅덩이가 생겨 있었다.

그 웅덩이 안에선 무수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넌 우리를 버렸지.”
“기억을 지우고 나서도, 우리가 남아 있단 걸 몰랐나.”
“반복된 선택은 죄가 된다.”

아린은 귀를 막았지만, 그 목소리는 머릿속을 직접 울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웅덩이 속에서 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피로 뒤덮인 코트, 반쯤 무너진 시계 문양의 마스크, 그리고 낯익은 눈빛.

“당신은... 누구지?”
윤시현이 물었다.

그는 조용히 마스크를 벗었다.
그리고 그 순간, 두 사람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는, 아린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다른 가능성 속에서 살아남은 아린,
즉, 기억의 반역자 아린이었다.

“나도 너였지.”
그가 말했다.
“하지만 너는 그 선택을 안 했어.
너는 기억을 지켰지.
나는... 기억을 버렸어.”

윤시현은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소리야?”

기억의 반역자는 광장의 바닥을 가리켰다.
그곳엔 또 하나의 시간의 심장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죽어 있었고, 회전하지 않았으며, 검게 타버린 기억 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내 세계에선, 기억이 너무 무거웠어.
사랑했던 사람을 죽게 만들었고,
모든 과거가 나를 고문했지.
그래서 난, 심장을 꺼내 기억을 지웠어.
그 순간, 이 도시는 나에게 영원한 안식이 됐지.”

윤시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기억이 고통스러웠다고 해서, 그것을 버리는 게 답은 아니야.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시간 속을 떠도는 유령일 뿐이야.”

아린은 조용히 말했다.
“내가 당신이라면, 기억을 다시 선택했을 거예요.
당신은 실패했지만, 우린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기억의 반역자 아린은 피식 웃었다.
“정말 그렇게 믿고 싶겠지.
하지만 너희가 돌아오면서, 균열이 더 심해졌어.
기억을 지키려는 의지가 너무 많아졌고, 이 도시는 지금 붕괴 직전이야.”

“우린 그걸 막기 위해 온 거야.”
윤시현이 말했다.

“그럼 날 이겨봐.”
그는 오른손을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수십 개의 기억의 감시자들이 웅덩이에서 솟아올랐다.
이들은 이전보다 더 빠르고, 더 인간적이며, 더 잔혹해졌다.

“이 도시의 기억은 이제 내 것이다.
너희가 그걸 되찾으려 한다면...
기억 자체를 파괴해야 할 거야.”

광장은 전쟁터가 되었다.
기억의 감시자들이 시공간을 왜곡하며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윤시현은 방어막을 펼치고, 시간파 억제 장치를 가동했지만, 이곳에선 효율이 30%도 되지 않았다.

“이건 기억이 만들어낸 현실이야.
이걸 이기려면, 우리가 기억을 재정의해야 해요.
아린이 외쳤다.

그는 시간의 심장을 들고 광장 중앙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외쳤다.

“나는 기억을 버리지 않겠다.
고통도, 상실도, 후회도 모두 나의 시간이다.
난 기억을 통해 성장했고, 기억을 통해 존재한다.
그러니 이 기억들아—나를 인정해라!”

그의 외침에 반응하듯, 심장이 강하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빛이 도시 전체로 퍼졌다.
마치 기억의 면역체계처럼, 원래 있던 흐름이 되살아났다.

기억의 반역자 아린이 몸을 움켜쥐며 쓰러졌다.
“안 돼... 이 기억들은 너무 위험해... 그걸 감당할 수 없어...”

윤시현은 다가갔다.
“우리는 감당할 거야.
그게 살아 있다는 뜻이니까.”

감시자들은 하나둘 흩어졌고, 도시의 붉은 안개도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기억의 반역자 아린은 마지막 힘을 짜내듯 중얼거렸다.

“너희가 이겼다고 생각하지 마...
기억은 언제나 반역할 수 있어.
기억은... 스스로를 배신하는 법이니까...”

그 말과 함께, 그는 기억의 틈으로 빨려 들어갔고 사라졌다.

아린은 한동안 광장 바닥에 앉아 숨을 골랐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심장이 있었다.
이제 그것은 조용한 박동만을 이어가고 있었다.

윤시현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기억은 때로 우리를 무너뜨리지만,
그래도 그게 우리가 살아 있는 증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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