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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파수꾼〉 제10부 – 시간과 말하다 〈시간의 파수꾼〉 제10부 – 시간과 말하다푸른 공간은 한없이 깊고도 무한했다.중력도 없고, 방향도 없고, 그 어떤 소리도 존재하지 않았다.그곳은 모든 기억 이전의 상태, 말 그대로 존재 이전의 시간이었다.윤시현은 조심스럽게 아린의 손을 잡았다.그녀는 지금 자신이 육체로 여기에 있는 건지, 아니면 오직 의식만이 이곳에 도달한 건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다만, 심장이 그녀 손 안에서 조용히 박동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모든 것이 현실임을 증명하고 있었다.그 순간—푸른 공간 전체가 진동했다.그리고 주위에 거대한 구조물이 떠올랐다.그것은 시계가 아니었고, 문도 아니었고, 건물도 아니었다.그건 ‘형태를 가질 수 없는 어떤 존재’의 의지였다.그 형체 없는 구조가 공간의 빛을 왜곡하며, 윤시현의 앞에 다가왔다.“너희가 ..
〈시간의 파수꾼〉 제9부 – 미래의 눈 〈시간의 파수꾼〉 제9부 – 미래의 눈기억의 반역자가 사라진 뒤, 잊힌 도시는 한순간 조용해졌다.광장을 뒤덮던 붉은 안개도 걷혔고, 바닥을 덮고 있던 망각의 그림자들도 흩어졌다.그들이 싸워 지켜낸 ‘시간의 심장’은 지금 아린의 손 위에서 조용히 박동하고 있었다.“이제 봉인할 수 있겠지...”윤시현은 힘겹게 일어섰다.도시 중심의 ‘기억의 문’은 붕괴 직전이었다.이 문을 닫지 않으면, 감염된 기억과 시간의 전염은 점점 더 확산될 것이었다.“심장을 원래 자리로 돌리고, 문을 닫아야 해.”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하지만 그 순간.하늘에서, 빛이 갈라졌다.잔잔한 기억의 틈 위로 새로운 균열이 생겨났고, 거기서 전혀 예상치 못한 ‘그것’이 떨어졌다.빛나는 입자들, 규칙적인 파장, 그리고...미래의 메시지.—윤시현은 ..
〈시간의 파수꾼〉 제8부 – 기억의 반역자 〈시간의 파수꾼〉 제8부 – 기억의 반역자문이 열리고, 윤시현과 아린은 다시 그 도시에 발을 들였다.하지만 처음과는 달랐다.도시는 완전히 뒤틀려 있었다.건물들은 하늘을 향해 뒤집혀 있었고, 시계탑은 무너진 채 바늘이 허공에서 멈춘 듯 떠 있었다.공기 중엔 붉은 안개와 함께, 기억의 조각들이 떠다녔다.과거의 파편,사라진 사람들의 환영,되돌릴 수 없는 선택들이 조각처럼 흩어져 도시 위를 맴돌고 있었다.“여기 완전히... 감염됐어요.”아린이 숨을 죽였다.그의 손끝이 떨렸다.시간의 심장이 그의 내부에서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이 도시 안의 기억이 날 인식하고 있어요.그리고... 뭔가가 절 부르고 있어요.”윤시현은 조심스럽게 주변을 스캔했다.장비는 아무런 신호도 잡지 못했다.이곳에선 이성과 과학의 법칙이 더 ..
〈시간의 파수꾼〉 제7부 – 시간의 전염 〈시간의 파수꾼〉 제7부 – 시간의 전염서울, 크로노 연구본부.윤시현과 아린은 잊힌 도시로부터 돌아온 지 일주일째였다.그들이 가져온 ‘시간의 심장’은 검은 케이스에 보관되어 있었고, 수십 개의 보호장치와 억제장치가 부착된 채 엄중하게 관리되고 있었다.하지만 그들이 돌아온 바로 다음 날부터, 전 세계 곳곳에서 이상한 사건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런던.교통사고를 당한 환자가 깨어나자, 30년 전 실종된 인물과 똑같은 기억을 말했다.도쿄.초등학생들이 ‘이미 일어난 내일의 일’을 묘사하며, 정부기관의 움직임을 정확히 예측했다.요하네스버그.폐쇄된 고철창고에서 19세기 언어를 쓰는 남자가 발견되었다. 그는 자신이 1841년에 이곳에 도착했다고 주장했다.윤시현은 이 모든 사건의 공통점에 주목했다.그 모든 사람들은, 아..
〈시간의 파수꾼〉 제6부 – 시간의 심장 〈시간의 파수꾼〉 제6부 – 시간의 심장검은 로브를 두른 존재는 마치 시간 그 자체를 두른 것처럼 보였다.모래시계로 만든 가면은 빛을 반사하지 않았고, 입도 귀도 보이지 않았다.그의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잊힌 도시 전체에 묘한 울림이 퍼졌다.그리고 주변의 시계탑들이 하나둘,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천천히, 3시 33분 33초를 지나치는 찰나.“시간이... 흘러가기 시작했어.”윤시현이 중얼였다.그러나 아린은 달랐다.그는 온몸이 오싹해짐을 느꼈다.움직이는 건 시간이 아니라, 기억의 파편들이었다.수천 개의 기억이 거꾸로 흘러가며, 자신들의 주인을 찾아가려는 듯 몸부림치고 있었다.그 존재가 입을 열었다.목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남성, 여성, 아이, 노인, 수많은 기억의 파편들이 동시에 말하는 듯한 공명.“너희..
〈시간의 파수꾼〉 제5부 – 잊힌 도시의 문 〈시간의 파수꾼〉 제5부 – 잊힌 도시의 문베를린, 시간복원위원회 임시본부.크로노 게이트 작전 이후, 윤시현과 아린은 철저한 격리에 들어갔다. 파수꾼 내부는 두 사람이 시간 균열을 돌파하고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 자체를 믿지 못하고 있었다.하지만 더 큰 충격은 따로 있었다.윤시현의 두개골 MRI 촬영에서, 시간 격자의 흔적이 포착된 것이다.시간 격자란, 일반적으로 인간의 뇌에는 존재하지 않는 다차원 기억구조로, 과거와 미래의 연산을 동시에 수행하는 구조였다.이건 인간이 ‘시간을 본다’는 감각 이상으로, 시간에 직접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뜻이었다.“내 뇌가, 기억을 ‘저장’하는 게 아니라 ‘연산’하는 거야...”윤시현은 조용히 중얼였다.아린도 마찬가지였다.그는 여전히 6살 아린의 모습을 가진 꿈을 꾸었고, ..
〈시간의 파수꾼〉 제4부 – 크로노 게이트 〈시간의 파수꾼〉 제4부 – 크로노 게이트새벽 4시, 서울 외곽 비밀 연구소.윤시현은 36시간 동안 한숨도 자지 않았다.크로노 게이트—시간 균열을 통과할 수 있는 최초의 인공 장치.그녀는 이 장치를 만들기 위해 전 세계에서 단 5명만이 다룰 수 있다는 양자파동 시정기, 기억인식 매핑센서, 그리고 인간의 뇌파를 동기화할 수 있는 초고밀도 네트워크 유닛까지 끌어다 조립 중이었다.그녀의 손은 떨리고 있었고, 눈 밑은 검게 꺼져 있었지만, 눈동자만큼은 살아 있었다.“이건 단순한 기계가 아니야.이건 ‘기억’을 재구성해 균열 너머의 시간과 접속하는 문이야.”카리나가 물었다.“그렇다면... 시간 속으로 진입하는 건 우리 중 누가 해?”윤시현은 대답하지 않았다.그녀는 조용히 데이터맵을 열었다.그 안에는 아린의 뇌파 구..
〈시간의 파수꾼〉 제3부 – 시간의 균열 〈시간의 파수꾼〉 제3부 – 시간의 균열0.0001초.그 시간 동안 아린은 낙하했다.무너지는 시계탑 속 붕괴된 공간을 지나, 그는 검은 틈 사이로 빨려들어갔다. 마치 현실과 비현실의 틈새에 있는, 물리법칙이 작동하지 않는 곳.그리고 그가 도달한 장소는 ‘시간의 바깥’이었다.거긴 어떤 감각도 존재하지 않았다. 색이 없고, 냄새도 없고, 중력도 없고, 심지어 언어도 닿지 않았다.단 하나, 소리 없이 진동하는 기억들만 떠다녔다.가장 오래된 기억, 가장 지워진 기억, 가장 원초적인 기억들이.그 중 하나가 아린에게 다가왔다.그 기억은 열기 어린 불빛 속 병원 복도였고, 울부짖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깃들어 있었다.“이건...”아린은 말할 수 없었지만, ‘인식’했다.자신이 죽었다고 믿었던 그날 밤.그러나 기억..
〈시간의 파수꾼〉 제2부 – 그림자의 기억 〈시간의 파수꾼〉 제2부 – 그림자의 기억시계탑의 거대한 문이 열렸을 때, 그 안은 상상보다 더 깊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흔한 먼지나 곰팡이 냄새도 없었고, 공기가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윤시현은 손전등을 들어 비췄지만, 빛은 몇 미터를 넘지 못하고 부서지듯 흩어졌다.아린은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들어섰다.그의 눈동자는 유리처럼 빛나고 있었다.“기억이... 여기 있어요.”그가 혼잣말처럼 말했다.리처드가 이어 들어오며 물었다.“무슨 기억?”아린은 머리를 감싸쥐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죽었던 순간의 기억이요.”—불과 몇 분 전, 그들은 그림자 같은 존재들과 조우했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얼굴이 없는 존재들.그들은 일종의 시간의 방해자였다.기억 속에 숨은 시공의 틈을 통과해..
〈시간의 파수꾼〉 제1부 – 눈 없는 시계탑 〈시간의 파수꾼〉 제1부 – 눈 없는 시계탑한밤중, 세계 각지의 전자시계가 멈췄다. 뉴욕의 브로드웨이 대형 전광판도, 도쿄 시부야 교차로의 LED 시계도, 서울 광화문의 보신각 종각 아래 시계도 모두 동일한 시각을 가리켰다. 오전 3시 33분 33초.하지만 기묘하게도 그 시각에 아무도 잠에서 깨지 않았다. 감지한 건 기계들뿐이었다.서울대학교 물리학부 연구실.윤시현 박사는 새벽에 울리는 경보음을 듣고 화들짝 잠에서 깼다. 그녀의 책상 위에 놓인 양자 시계가 붉은빛으로 점멸하며 진동하고 있었다.“시간 간섭 현상 감지됨. 코드 118. 파동 중심: 북위 52도 12분 24초, 동경 13도 24분 37초.”“베를린...?”윤시현은 곧장 데이터 로그를 확인했고, 기이한 그래프에 숨을 멈췄다. 시간의 흐름이 특정 ..